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수원시의 문화사업으로 카톡방에 시를 소개하는 이색 프로그램에 접속되었습니다. 시에서 보내준 파일에 연결하니 숲의 파티 수원, 수원시립미술관, 아쿠아플라넷 광교, 오산버드파크, 의왕레일바이크를 소개하는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을 소개하는 글을 보고 부부가 날을 잡아 1일 3박물관을 방문하였습니다. 사실 세계적인 박물관은 6개월을 다녀도 관람이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수원시 3개 박물관을 하루에 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료관람이니 서둘러서 하루동안에 일단 돌아보고 나중에 시간을 내서 차분하고 정중하게 관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수원박물관 수원박물관은 경기남부경찰청과 경기대학교 기숙사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탈면 입구를 올라가면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드넓은 초록의 공간이 나옵니다. 수원시의 역사와 문화, 한국의 서예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수원 행정책임자의 공적을 기념하는 선정비 27기가 한 줄로 서서 방문객에게 인사를 합니다. 어린이 체험실과 자료실, 북카페 '여민동락'이 어린이 시민을 반기고 있습니다. 역사관에는 1960년대 수원의 거리가 재현되어 있습니
공직사회의 권위주의가 어느 정도 살아 있던 시절에 "아첨도 능력"이라는 당시 부지사님의 공개 글에 도청 공무원 모두가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경기도 이천이 고향인 고시출신의 강직한 고위공무원이 후배, 동료 공무원이 보는 게시글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게시글에 대한 해명, 해석이 附椽(부연)된 기억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조대왕의 '무취불귀'와 비견되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했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無醉不歸)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그런데 ‘무취불귀'란 말은 실제로 취해서 돌아가라고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술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리더라면 정조처럼’이라는 책에서 김준혁 교수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화두는 ‘과공은 결례’입니다. 손님을 초대한 주부가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는 ‘차린 것이 한 개도 없다’라고 말하고, 손님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라 치하의 말을 합니다. 그동안 보아온 상다리는 튼튼해서 상위에 음식을 제아무리 많이 올려도 휘거나 부
골프는 4명이 함께 잔디밭을 이동하면서 골프채를 이용하여 자신의 공을 홀컵에 넣는 경기입니다. 골프는 타수가 적어야 기분이 좋고 골프채 운동을 적게 하고 타수 잘 나왔다고 기분 좋아하는 스포츠입니다. 흔히 말하는 주말골퍼들은 100돌이라 해서 95~100타를 오가면서 이 타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산 정상에 올라가서 '야호'하면서 기분 좋아합니다. 반면 정신과 신체 건강을 위해 나선 골프는 운동내용보다는 타수를 가지고 그날의 운동 결과를 평가합니다. 타수가 적으면 운동량이 적은 것이고 타수가 많으면 운동을 많이 한 것인데 운동을 많이하면 화가 나고 운동을 적게 하고도 기분 좋아하니 골프를 하지 않는 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오묘한 골프를 골프라 말하지 않고 '운동'이라고 말하게 된 이유는 과거 일부 층에만 허락된 골프를 대놓고 말하기 어려워서 그리 한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아마도 자신들만의 귀족 스러운 운동으로 신비감을 주기 위한 이유도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누구나 편안하게 ‘골프 간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1980년대에는 절대 비밀이었고 그래서 골프장에 가면서 '골프장에
언론에 장문의 글을 쓰고자 한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보관’, 즉 대변인이라는 직위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첫 번 소재로 삼고 싶었다. 1999~2007년까지 경기도청에서 근무하신 여섯명 공보관 또는 대변인에 대한 이야기다. 1999년에 처음 아웃소싱 공보관을 만났다. 당시에는 별정직 4급 공무원이다. 중앙에서 언론이나 언론홍보에 근무한 경력이 짱짱한 분들이 채용되었다. 그동안 공조직 안에서 상하좌우 짜임새 있는 근무 틀에 익숙한 분들과 근무해 왔는데 이분들은 파격적이었다. 민간에서 경험한 바를 행정에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화재 현장에 택시 타고 달려가는 열정을 배웠다. 도정에서 언론 관련 사건이 뜸해지면 금연에서 발생하는 '금단현상'을 겪는다고 했다. 공보관실#대변인실은 늘 언론 관련 사건들이 줄지어 들어서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이다. 민간에서, 정치에서, 행정 밖에서 행정을 컨트롤하는 황소의 고삐조차 없는 무중력의 정치적 공간에서 날아다니시던 분이 행정, 도정이라는 고삐에 묶이고 공보관, 대변인이란 공인명함을 들고 일하시는 과정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분들을 제대로 보좌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선은 행정 시스템을 민간기업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당시
경기도공무원 대부분이 근무하는 사무실, 즉 경기도청 청사는 서울 광화문에서 시작됩니다. 도청의 전신인 京畿監營(경기감영)은 서울 한성부 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청 청사가 서울시에 있는 것은 경기도민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53년 4월 15일 경기도 인천시에서 먼저 ‘경기도청 유치위원회’가 발족되자 1주일 뒤 수원시에서도 ‘경기도청 수원 존치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存置(존치)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수원에 경기도 감영이 있었고 6.25전쟁 당시에도 임시도청이 설치된 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62년에 수원의 지역 유지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도청을 수원으로 이전하자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는데, 1963년에 박창원 경기도지사는 청사를 시흥군 안양읍에 이전하자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병희 수원유치위원장(제6,7,8,9,10,13,15대 국회의원)이 도의 발전과 미래를 생각하며 삭발까지 감행해 박정희 의장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도청 이전을 요청하였던 바 1963년에 법률 제1538호가 제정되어 수원으로 결정되고 팔달산에 청사를 준공하여 1967년에 '서울도청'이 수원시에 移轉(이전)했습니다. 참고로 공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