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어느날, 아침 출근한 기자는 무슨 일을 할까요. 우선 출근하여 부장, 차장에게 인사를 하고 커피도 마시고 복도에 나가 담배도 피웁니다. 과거 한참 시절에는 기자 책상위에 대형 유리 재털이가 있어서 오전에 한 웅큼 채운 후 비우고 오후에 출입처에서 돌아온 3~4시부터 6시까지 한 번 더 채워준 후 오늘 밤에도 한 번 더 피울 요량이었습니다. 끽연자의 천국이랄 수 있는 1980년대에는 공무원 책상위에도 재떨이가 있고 기자 책상위에도 재떨이가 있다는 사실이 공통점이라면 저녁 8시 이후 공무원 책상위에는 전화기만 달랑 남아있는 반면 기자님 책상 위 자료는 3년4년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기자 책상위의 자료들은 정치부에서 사회부, 경제부에서 문화부로 발령 나야 잠시 정리되었다가 후임자가 와서 1개월 쯤 지나면 본모습 그대로 자료가 쌓이게 마련입니다. 이는 출입처 기자실에도 마찬가지인데요 10년 이상 한 기관에 출입한 기자의 책상 위 자료가 쌓인 모습을 보면 마치 地質(지질)학자가 쌓이고 싸인 모래 퇴적층에서 고생대 중생대를 구분해 내듯이 갱지와 복사지가 연대별로 쌓이면서 太陽熱(태양열)에 의한 숙성 정도에 따라 그 자료 단면의 색이 초코렛 색에서 연한 홍차
이 세상에 나쁜 기사 없고 좋기만 한 기사도 없습니다. 모든 기사는 그 속에 起承轉結(기승전결)이 있고 生老病死(생로병사)가 존재합니다. 한 건의 기사에는 그 주의 해당기관 스토리가 담기게 됩니다. 행정기관에서 나오는 보도 자료를 해석하는 경우의 수는 그 기관을 출입하는 기자의 수보다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아직 얼굴을 못 본 인터넷 기자, 내근 기자들이 우리의 보도자료를 참고하여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나쁜 기사로 예상되는 사안에 대한 기자의 취재가 시작되면 적극적으로 설명하여 우리 측 의견이 기사에 반영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자는 늘 양쪽의 의견을 들으려 합니다. 이른바 반론권을 인정해야 그 기사로서의 형식이 갖추어 지기 때문입니다. 가끔 방송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상대편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거나 통화는 되었지만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도 반론권을 인정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입니다. 여하튼 기자가 취재하는 것이 감지되면 여러 가지 방법과 방식으로 대응 하여야 하는데 초기 단계에는 취재기자만 접촉하여야 한다. 큰 건이라면 그날 아침 데스크 편집회의에서 사회면 면 톱으로 잡고 취재지시를 한 것이겠지만 잘잘한
언론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니 공무원으로서 모시고 근무했던 계장님을 선배님이라 존칭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1988년 임사빈 경기도지사 재임시에 저는 세정과에서 문화공보담당관실로 발령을 받아 언론인에게 행정업무의 홍보 자료를 기사문으로 작성하여 전달하는 이른바 '아이템 담당자'로 일했습니다. 이 자리는 누구의 결재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료를 받아 자료를 작성한 후 기자실에 배포하면 다음날 석간에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한 기사가 인쇄된 신문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아주 재미있게 일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도지사님 주재의 간부회의시에는 상황실 뒷 편에서 오디오를 청취하던 중 의미있는 말씀이 나오면 간단히 메모한 후 지방 신문사 기자에게 전화로 알려주면 원고지 1매 이내의 가십기사가 오후 2~3시경 윤전기를 통과하는 석간신문에 실리니 이 또한 밤나무 아래서 3개 또는 2개의 초콜릿 알밤을 줍는 기분입니다. 취재와 기사 보도과정이 1:1로 마감되는 것이 공무원 초짜(공무원 11년차)로서는 얼마나 신명나는 일이겠습니까. 특히 당시의 임사빈 경기도지사로 말씀드리면 정말로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양주군에서도 본 양주에서 출생하시어
기관장은 물론 간부의 사진은 보통 3장이 필요한데 1980년대 신문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문선공이 자료실에서 이름만 맞으면 편집부로 올렸나 봅니다. 이재창 도지사님은 그 전에 경기도 부지사를 하셨으므로 당시 젊고 머리를 수수하게 약간 퍼머끼가 있는 멋진 사진이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도지사로 취임하신 후 새로 찍은 말끔하게 빗어넘긴 정말로 멋지고 행정적인 사진으로 바꾸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요즘에는 사진파일을 보관하면서 필요할 때 신문에 편집합니다만 당시에는 사진을 동판으로 찍어서 관리했습니다. 도지사 사진이 필요하면 자료실에서 동판을 꺼내어 활자사이에 끼워넣어 편집하였습니다. 그 언론사의 도지사님 사진 동판을 신판으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사님 때는 아예 신문사에 가서 동판을 달라 해서 지사님께 회수결과를 보고한 일도 있었습니다. 임사빈 지사님은 사진이 잘 나오는 각도가 있으시므로 공보실 사진담당 주무관은 늘 이를 신경 썼지만 신문사 사진부 기자들은 전체 구도에 더 신경을 쓰다 보니 지사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옆모습이 게재되고 이를 개선하라고 공보담당관에게 말씀하시니 이 또한 받자옵기 쉬운 과업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티지털
1988년 경기도청에 주재하는 중앙사 기자들은 수시로 수원역에 갑니다. 사무실에서 100자 또는 200자 원고지에 기사를 써서 기사 관련 사진과 함께 봉투에 담아 본사 지방부 기자 앞으로 보냅니다. 팩스 전송도 용이하지 않은 시절이므로 인편에 원고와 사진을 직접 보내는 것입니다. 서울역에 도착한 기관사는 부산에서 대구 대전 천안을 거쳐 수원역까지 올라오는 동안 정차역마다 수집한 언론사 원고를 서울역사 안 각 언론사 사서함에 넣어 줍니다. 본사의 역송 담당자는 오전에는 2시간에 한번 서울역에 사송을 다녀옵니다. 석간 신문사는 오후에 신문을 내놓아야 하므로 점심을 먹고 나면 더더욱 바빠져서 매시간 단위로 서울역 사서함을 열고 자료를 받아와서 해당부 기자에게 전합니다. 그리해서 그날 저녁에 기사로 나가거나 늦으면 다음날에야 신문에 빛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팩스라는 기계가 있어서 원고를 보내기도 하고 기계실에 가면 둥근 통에 사진을 감고 기계를 돌려서 긴 선으로 사진을 보내면 본사 기계실에서 지진계 돌아가듯이 사진을 이른 바 주사선으로 돌려받으므로 오차가 나면 톱니바퀴체 잘린 듯 촛점 흐린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보면 과거의 추억이겠지만
태초에 당신은 하늘에 매달린 작은 점이였지요 어둠이 사라지고 햇볕 반짝이는 날 점은 나뭇잎처럼 보이다가 나비처럼 보이기도 했죠 좀 더 가까이 오세요 이제 날개가 보이는군요 조금 더 가까이 오세요 조금만 더 아, 날개를 다쳤나봐요 너무 멀리 날아와 지쳤나봐요 이제 조금씩 숨고르기 할 때예요 작은 눈도 보이네요 노랑부리도 보이고요 황금빛 날개도 보이네요 부리에 작은 별을 물고 있네요 당신은 어느 별자리에서 왔나요 그 행운의 별자리를 알고 싶어요 은하수 건너 어디엔가 있을 그 별자리 궁금하네요. 김재자 시인 경기화성 출생, 일간지에 ‘노랑부리 백로’ 등을 발표 작품 활동 시집 『말 못 하는 새』가 있으며 글샘동인, 현재 용인병원유지재단 이사 -시작메모- 이 시는 어쩌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같은 시다. 우주는 점으로 부터 탄생이 되었고 지구상의 모든 형체는 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속설이 있다. 따라서 점은 만물의 근원이다. 새는 멀리서 보면 점으로 보이고 가까이 올수록 나뭇잎과 나비처럼 보인다. 시인은 이러한 관점에서 시각적 모티브와 원근법을 살려서 하나의 시로 승화 시켰다. 점으로 보이던 새가 가까이 와서야 눈과 부리, 날개가 보이는데 그때서야 날개가 다친 것을
1989년 어느날. 중앙사 K기자는 100자 원고지에 살살 내려쓴 후 팩스 보내고 데스크에 전화하면 끝입니다. 그날 송고해야 할 기사를 난로가에서, 소파에서 머리 속으로만 구상한 후 이제다 싶으면 자리에 앉아 플러스 펜으로 초서처럼 내려쓴 후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팩스에 밀어 넣습니다. 잠시 후 본사 지방부에 전화를 해서 도착 여부만 확인하면 끝입니다. 생각 2시간 기사작성 3분, 송고 2분이면 끝입니다. 다른 중앙사 L기자는 원고지 200자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아침 10시에 보도 자료를 배포하면 앞으로 자신에게는 8시 반에 미리 달라 하십니다. 자료를 받으시면 즉시 기사작성을 시작합니다. 우선 제공된 보도자료에 검정색으로 수정 가필한 후 읽어봅니다. 다시 100자 원고지에 옮겨 적고 붉은색으로 가필한 후 청색으로 고치고 검정색으로 첨삭합니다. 또다시 수정하는 원고지 위에 교통지도, 도로망도가 그려진 듯 복잡합니다. 글씨를 쓰시는데 심혈을 기울이십니다. 참으로 바쁘고 치열합니다. L기자님은 점심시간 맞추기도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석간이므로 오후 1시경 지방판이 마감됩니다. 점심을 제때에 맞추지 못하고 늘 바쁘십니다. 수차례 수정과 加筆(가필)을 거듭한 끝
경기도청 최초의 아웃소싱 공무원으로 말하자면 잠사계장과 잠업특장과장을 역임하시고 퇴직 하신 후 수원시 문화원장, 민선 수원시장, 국회의원을 역임하신 심재덕 전 수원시장님을 들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가 비단을 생산하는 누에고치를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 산업경제의 기반에 도움을 주었는데 이를 적극 추진하기 위해 당시 고등학교 교사인 심재덕 시장을 특채하여 파격적으로 사무관에 임명하고 이후에는 과장에 승진보직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웃소싱의 원조가 되셨습니다. 이후 심 시장님은 특히 세계 화장실협회 초대회장을 하셨으며 수원시는 물론 우리나라 화장실 문화의 선진화에 크게 기여하셧습니다. 이후 경기도청에 외부 전문가가 자리한 직위는 비서실장, 여성국장, 공보관이었으며 1999년 홍보기획팀장으로 발령받았고 J공보관을 만난 다음 날 기존의 업무가 바뀌면서 새로운 홍보기획이라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그 자리는 언론인과 접촉하는 자리로서 발령소식에 동료들이 술 많이 먹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해 주었지만 정작 근무 내용은 서면접촉을 할 뿐 언론인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술을 마실 기회도 없습니다. 부서의 역할을 바꾸신 J공보관은 부임 초부터 새로
공무원과 언론인의 끝없는 말싸움은 자료를 달라하고 못준다 하는 것입니다. 자료를 주라는 법이 없으니 심한 경우 '정보공개청구'를 하라고 합니다. 대외비가 아닌 문서라면 달라하고 내가 처리한 문서를 기자에게 줄 수 없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이는 닭과 계란의 문제이고 부산까지 달려도 늘 평행선인 좌측 철길과 우측 레일입니다. 숫자 2는 곱해도 4, 더해도 4이듯이 언론인과 공무원의 대화는 늘 평행선입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모든 보도 자료는 공보실을 통해서 주고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각 부서는 공보관실이 요구한 자료를 공보관실 직원에게 전달하고 공보관실은 그 자료를 기자에게 전하니 각각의 책임부담을 조금씩 분담하는 것입니다. 공보관실 직원도 공무원이니 자료의 내용을 파악하고 나가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사업부서에서도 자료를 제공하면서 기자에게 나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 마음속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기자들도 무턱대고 행정기관의 자료를 보도하기에는 나름 규율이 있을 것입니다. 언론이 폭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언론보도의 수위가 있으니 말이다. 사회적 공익적 책임이 있습니다.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조정을
홍보기획부서에 근무한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나 茫茫大海(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심정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보도 자료는 각과의 행사나 행정실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로 내놓을 자료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요즘에는 우리 기관에서 보도 자료를 낼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도 자료가 될 수 있으며 기자들에게는 호재가 될 것입니다. 보도 자료가 적은 이유가 기관장의 외유 때문인지 부단체장의 소극행정이 그 이유인지 아니면 간부들의 복지부동으로 인한 결과인지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감사기관의 강도 높은 사정방침이 행정을 위축시키고 실무자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중간 관리자의 결정을 미루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3개월 이상 지지부진 늘어진 인사작업으로 인사 온통 피로도가 쌓이고 결국 행정의 진도에 큰 걸림돌이 된 사례가 있었습니다. 보도 자료가 현격히 줄어든 것은 물론 각부서 문서발송 건수도 감소하고 발간실이 파리를 날리다 못해 파리채로 파리를 잡는 등 인사지연은 공무원의 업무능력을 크게 감소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곧 인사가 있을 것이니 조금만 며칠만 미뤄보자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