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공직의 회식에 4급 부서장이 30분 늦게 도착했다. 먼저 자리한 30명 직원들의 불만이 일기 시작하더니 7급 중간쯤 되는 선임들이 몰래 반찬을 먹기 시작했다. 요즘 부서장이라면 자신이 늦으니 먼저 식사를 시작하라 연락을 하겠지만 당시의 공직 상층부 어르신들은 그런 배려를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몰래 시작된 접시빼기는 한동안 진행되었고 결국 상다리 아래에는 10개가 넘는 빈 접시가 쌓였다. 1985년 회식 중반에 술을 강권하는 간부를 조력(?)하면서 또 문제의 그 7급 선배들이 건네준 사이다가 든 소주병을 서빙하다가 혼자서 다 뒤집어 쓰고 벌주를 하사(!)받았다. 그날 회식은 음식 먹은 기억은 없고 벌주로 마신 소주의 진한 진향만 생각난다. 25도 톡 쏘는 소주의 송진 맛을 당시 젊은이들은 진맛이라 했다. 8급까지는 당하는 줄 알면서 피하지 못했던 회식의 아픈 기억이 참으로 많기도 하다. 2015년경 세월이 흘러가니 이제는 회식을 주관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일찍 도착해서 동료들을 기다렸다. 참석 인원만큼 사다리를 그려서 자리를 정했다. 복불복으로 결정되는 자리이니 방석 배정에 대한 불만이 없고 옆자리, 앞자리에 누가 앉는가는 그날의
승진하면 대부분 부서를 이동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고 승진은 아니지만 발전적인 자리바꿈도 당사자에게는 큰 기쁨이기에 동료들이 새로 온 직원을 포함하는 송·환영회를 연다. 식사하기 전에 기념품 전달을 하기도 하는데 꽃다발을 주고 Y-셔츠, 벨트, 지갑, 상품권을 전달한다. 현직에서 부서직원이 부서를 떠나면 복사지 6장을 연결해 붙인 장문의 소개글을 지루할 정도로 읽었고 그 두루마리가 나중에는 술잔을 올리는 쟁반이 되기도 했다. 송별회는 함께 근무한 정을 담아 그간의 노고를 자화자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부서에 가게 되는 기대감을 마음껏 발산하는 모임이기도 했다. 아마도 기념품은 막내 후배가 챙겨서 다음날 새로운 부서로 이동할 때 이른바 후행단원들이 함께 들고 가서 다시 한번 전했던 기억도 있다. 이처럼 부서를 이동하는 이에게 함께한 마음을 담아주는 기념품에 대한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물론 1급 공무원 상사이니 이런저런 고민을 한 바가 있다. 그래도 경기도에 근무하다가 중앙으로 영전하는 분이니 의미있는 기념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함께 매주 간부회의를 열고 도정을 함께 고민하고 검토했던 국장들의 주머니돈을 모아서 기념품을 만들
1974년 2월 소인이 찍힌 5원짜리 관제엽서는 초등학교 은사인 황인각 선생님이 봉담초등학교 재직중에 보내주신 고등학교 합격을 축하하는 편지다. 세필 붓으로 “축! 합격, 진심으로 합격을 축하합니다"라고 정성스럽게 적어 보내주셨다. 이 엽서를 앨범에 넣어두고 간직하다가 10년 전부터 자랑을 시작했고 지금도 愛之重之(애지중지)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인들에게 보이곤 한다. 요즘에는 손편지를 거의 보내지 않으니 우표값을 알지 못하겠지만 1998년에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다시 찾아보니 우표 170원이 붙어있다. 2003년 6월에 아이들이 수련회가서 보낸 편지의 우표는 190원이고 2006년 편지에는 220원, 2018년 엽서는 330원이다. 요즘에는 편지보다 소포가 많은데 책 한권 보내는데 4,000원을 지불한다. 안산소재 직장을 다닐 때는 가끔 아내와 아이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서 손편지 쓰기를 확대하자는 의견을 SNS에 올렸다. 기자가 보고 기사로 올렸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평소 하지 못한 진심을 담은 편지를, 자리를 옮긴 동료에게는 의례적인 문자메시지 대신 손편지를 통해 축하인사를 전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손편지 사랑은 언제
분재는 고개를 숙인 자에게 眞面目을 보인다 하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도 한다. 올라올 때 못 본 꽃을 내려갈 때 보았다는 시가 있다. 제목 그 꽃 / 시인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여기서 꽃은 사람일 수도 있고 정말 꽃이기도 하겠다. 바쁘게 살다 보니 다 살피지 못하는 인생이다. 아들딸 자식보다 손자 손녀가 더 예쁘다는 역설이 역설이 아니라 정설이란다. 젊어서는 직장을 다니면서 아들딸 키우기에는 버거웠고 인생 중 청춘이 바빴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꼬물거리는 슬하의 손자 손녀가 예쁘단다. 자식은 내리사랑이란다. 과거 봉건시대에 시골에는 아들은 미워하여 외면하면서 손자 손녀를 귀엽다 하는 할아버지가 많았다. 그래서인가 세상사는 보는 시선과 시야에 따라 달리 보인다. 색안경을 쓰고 보지 마라는 말로 풀어본다. 잘할 것이라는 동료가 틀렸을 때 오는 실망감보다 못할 것이라는 후배가 잘했음을 알아내지 못하는 선배가 걱정이다. 우리 사회는 끊임없는 선배와 후배의 연결고리로 이어간다. 그리니 가정이든 직장이든 정치사회이든 지역사회 모임에서조차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고 그 사람의 시각과 시선을 공유해야 한다. 자신의 고정 프레임을 고수하는 것은 '슬
인간의 생활현장을 들어다보면 참으로 수많은 소품이 필요하다.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는 엄마의 짐은 作戰(작전)나가는 군인들의 배낭무게를 넘을 것 같다. 衣食住(의식주)를 메고 들고 다니는 듯 보인다. 우유병, 분유, 보온병은 먹일식食이고, 기저귀, 손수건, 티슈, 면봉 등은 옷衣이며 유아차로 개명하자는 유모차, 양산, 지붕 등은 주택의 住주라 하겠다. 반면 사자와 호랑이는 천적의 속도를 따라잡는 탄력스러운 네다리와 방향을 조절하는 꼬리, 뾰족한 송곳니, 후각, 빠른 판단력으로 먹고산다. 방송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면 그 처절함이 보인다. 물소나 양 등 큰 동물을 공격하는 모습에서는 사자의 위엄보다는 먹이를 구하려는 가장으로서의 애잔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은 사자에게 뿔이 있으면 더 쉽게 사냥에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신은 뿔을 주지 않았고 사자는 뿔 없이도 밀림의 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화면은 사자, 호랑이, 표범, 하이애나 등 맹수들의 공통점이 뿔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뿔을 쓰지도 않을 것 같은 소, 누우, 사슴, 산양 등 비교적 약한 초식 동물에게는 뿔이 주어졌다. '동물의 왕국' 방송을 보면 사슴, 산양
편지내용을 소개한다. "인간이 자연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공무원의 심정으로 돌아가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나 반성하기도 합니다.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비록 재산을 잃고 몸과 마음의 고생이 컷지만 인명피해를 최소화 한 것에 보람을 느끼고, 그때는 모르고 뛰어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동료직원까지 위험에 빠트릴뻔한 일도 떠오릅니다. 가슴 뜨거운 일도 생각납니다. 군부대 장병들의 뜨거운 조국애, 수백리길을 달려와 집안 청소를 돕고 따뜻한 국물로 용기를 주고, 격려의 말씀을 보내주신 주변의 많은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 끝이 없겠습니다." 동두천시 생연4동장으로 근무하다 부서를 이동한 1998년 11월 30일에 통장님, 자문위원님 등 어르신 150명에게 보낸 편지를 보관해 오신 통장님께서 원본을 기증해주셨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이 있었다. 봉투를 얻어 곱게 간직하여 가져왔다. 그리고 밤늦게 편지 필사 워딩을 하고 통장님께 감사편지를 적었다. "감사패!!! 위 어르신은 1998년 동장의 이임 감사편지를 23년간 보관하시고 역사자료를 기증해 주셨기에 감사패를 드립니다" 공직 중 써온 도장 5개를 모두 찍었다. 편지
2017년 5월16일은 공무원 초임 9급 서기보시보 발령을 받은 지 꼭 40년이 되는 날입니다. 초임 발령일이 1977년 5월16일이고 '58년개띠'이니 弱冠(약관) 1년전인 19세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 보람된 날이어서 초임 발령장 사진과 함께 소감문을 페이스북에 올리니 동기 한 분이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습니다. 40년 전 19살 까까머리에 면바지, T-셔츠를 입고 발령받으러 가서 복장불량으로 화성군청 행정계장님의 면박을 받고 웃옷을 빌려입고 군수님 발령장을 받아 시작한 公職(공직)의 시작은 硬直(경직)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발령장 43장을 받으면서 임용장을 받는 상황실에서 긴장을 푼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발령대상자 인원에 관계없이 줄을 세우고 늦게 오면 야단맞고 일찍 온 공무원 모두에게도 숨이 멈출 것 같은 긴장감을 조성하는 ‘인사계 군기’는 어느 기관에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개인별로는 10초 안에 끝나는 발령장 받기 의전을 위해 30분, 50분을 긴장한 채 대기하였으므로 결재판처럼 뻣뻣한 발령장을 들고 회의실을 나서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습니다. 1990년경까지는 오전에 발령받고 오후까지 이 과(課) 저 부서(部署)를 돌면서 인사
며칠 전 여행 중에 데크에서 넘어진 여행객을 119구급대원이 응급조치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게 된다. 얼핏 보기에 무릎에 찰과상으로 피가 흐르고 오른손은 골절인듯 부목을 대고 응급조치를 받았다. 강건너편에 119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서 다시 차로 갈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분의 사고상황은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자갈길과 데크로 구성된 평지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발끝이 자갈에 미끄러졌거나 데크에 등산화가 걸려 넘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안전사고는 순간에 발생하지만 그 결과는 골절부상과 찰과상을 입게되고 이후 2~3주간의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일상생활에 불편함은 물론 직장에도 휴가를 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안전만을 강조하는 것이 정답은 아닌듯 여겨진다. 어려서 시골아이들은 나무를 깍고 풀을 베고 화로불에 밥을 볶아 먹었다. 초등생끼리 숯불에 계란을 삶아먹고 소죽을 끓였다. 닭과 오리를 잡아 삶아먹은 초등 5~6학년생도 많았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연필을 깍는 것 조차 기계에 의존한다. 초등생이 칼을 쓰는 작업은 안전을 이유로 금지사항이다. 연필을 깎는 작업은 손의 미세한 움직임과 위험한 칼날
어려서 3권짜리 삼국지를 읽었다. 표지가 떨어져 나간 이 책을 동네 청년들이 돌려가며 보았다. ‘새 농민’이라고 월간지가 우체부 아저씨의 붉은 가죽가방에 담겨 배달되었다. 아마도 당시 농어촌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만든 잡지였을 것이다. 거기서 고바우 영감을 처음 만났다. 이마에 머리카락 한 올 세우고 세상을 비평하는 4칸짜리 만화였다. 세월이 흘러 책이 줄어들고 모바일이 늘었다. 전기만 통하는 철선인 줄 알았는데 전기 줄 속으로 말이 오간다. 시골마을 이장집에 전화기가 들어오자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선다. 도시에 나간 아들딸에게 소식을 전하고 그 자녀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줄을 서니 이장님 집 앞은 줄서는 맛집(!)이 되었다. 이장님댁 전화를 쓰기 위해서는 10원짜리 동전이 필요했다. 시외전화 전용전화기로 시내전화가 되는 줄을 누군가가 알아냈다. 유레카~! 대단한 발견이었다. 시외전화 되는 기기이니 시내는 당연히 되는데 시외만 거는 줄 알았을 정도로 착하게 몰랐다. 모바일은 무선으로 연결된다. 이제 4살 아이도 그림책을 문지르다 화면이 바뀌지 않으니 책을 내던진다. 매일 오전, 오후로 예쁜 사진을 주고 받는다. 참 좋은 글을 어디서 구했는지 긴 문장
다시금 전문가들의 글을 자세히 꼼꼼히 읽어보게 된다. 기회를 얻어서 이처럼 글을 올리는 입장이 되고보니 다른 분들의 글에 관심이 가고 신문 사설도 읽어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같이 짧은 문장속에 옥수수알처럼 빼곡하게 담아내는 꼭 필요한 단어의 조합과 융합에 감탄한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듯 꼭 필요한 자리에 한자, 사자성어, 숙어를 재료삼아 사우디 부호들의 카페트 엮어가듯 사각과 네모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도대체 한글과 한자를 가지고 만들고 짜낼 수 있는 모자이크는 얼마나 많고 그 바닥은 얼만큼 넓은 것일까. 우선 짧은 2글자 제목이 마음에 든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두 글자 제목에서 절반 이상 설명한다. 시의적절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필자의 생각 절반이 마음에 들어온다. 그리고 눈으로 문장을 살피면서 공감을 하게된다. 현악기의 화음처럼 제목과 내용이 잘 맞아 돌아간다. 그리고 起承轉結. 그렇게도 깔끔한 문장의 이어감이 마지막에서 한잔의 사이다처럼 청량하다.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구나. 감탄과 탄복을 하게 된다. 그런 글을 쓰시는 분이 즐비한 세상이다. 볼수록 존경심만 가득하게 하는 분들이다. 펜으로 키보드로 오케스트라 80명을 지휘하는 모습이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