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위를 걷는 고양이

정겸

카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도심으로 손돌바람 몰아치자

전선줄은 일제히 발정 난 암고양이 울음 토해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누군가를 흘긋흘긋 훔쳐보며

좀비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있는 베스트실버요양병원

고양이 한 마리 음식물 쓰레기통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가시 덮인 청미래넝쿨 숲을 뚫고

흙먼지 날리는 황토길 달려 왔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짙은 어둠을 밀어 내고 빛을 모았다

크로노스가 작곡했다는 쉼표도 없는 악보 속에서

난이도가 높은 음계 따라 파도를 타며 살아 왔다

아다지오와 안단테가 표시되지 않은 악보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를 찾아 거친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삶을 끌고 가던 주파수가 끊겼다 이어지고 다시 끊긴다

희미해지는 전파채널을 잡으려 양쪽 귀와 꼬리를 곧추 세워본다

음파가 멈춘 난청지대에서 안테나를 조절하며

주파수를 찾고 있지만 이제는 잡음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다

무뎌진 발톱 보듬고 허공 향해 앞발 치켜들며 휘젓는 늙은 고양이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비틀거리며 걷는다

길 옆, 폐휴지 가득 실은 낡은 리어카 가로수에 몸 지탱하고 있다.

 

 

 

 

 


정겸 시인

1957년 경기 화성출생(본명 정승렬), 2003년 시사사 등단, 시집 '푸른경전', '공무원', '궁평항', 공무원문예대전 시, 시조부문 행정안전부장관상, 경기시인상 수상, 현재 칼럼니스트와 한국경기시인협회이사로 활동


-시작메모-

요즘 어디를 가나 길고양이를 흔히 보게 된다. 과거에는 도둑고양이라는 누명을 씌워

학대 했다. 그러나 요즘은 생명 존중 사상에 힘입어 많이 보호되고 있으며 우리 국민들의 야생동물을 사랑하는 정서와 의식수준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영향도 있다.​

아무 가림 막이 없는 야생의 길고양이 들이 어쩌면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인간의 근원인 선(善)과 악(惡)사이에서, 그리고 편을 가르며 이념적 싸움에 몰두하는 현실의 세계를 보면 우리는 역시 카인의 후예인 것이다. 인간의 옆에서 항상 함께하는 고양이들은 인간을 닮아가고, 인간은 고양이를 닮아간다.

그 인간과 고양이들은 악보위에 그려진 음계처럼 긴 시간 동안 롤러코스터를 타며 긴장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한 가정의 평온과 안정을 위해 한 눈 팔 사이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지만 생명체들은 시간이 지나면 노화하고 생의 리듬이 느려진다. 시각은 물론 청각도 떨어진다. 몸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마음은 젊은 시절 그대로라 생각하고 발버둥 치며 또 다른 무엇인가 잡아보려 온 힘을 다한다. 그러나 세상은 연로한 어르신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질 않는다. 늙은 고양이의 생애처럼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허공 속에 그 무엇을 잡아보려 애를 쓰지만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저 허무할 뿐이다.

또 다른 출발을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해 걸어보지만 비틀거리는 이 걸음을 어이 할까. 파지를 잔뜩 실은 어르신이 손수레를 힘겹게 끌며 피안의 언덕을 오르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으로서 선을 베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정겸​(시인/한국경기시인협회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