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맛집이라고도 하고 미식가라는 말도 듣습니다. 조크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맛있는 식당을 잘 알면 아저씨이고 멋진 식당을 꿰하고 있으면 오빠라는 칭찬을 듣는답니다. 아저씨들은 맛집으로 승부를 걸고 오빠들은 멋집에 빠집니다. 혁대라 말하면 아저씨이고 벨트라 하면 오빠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맛집과 멋집만이 식당과 메뉴의 선택기준으로 필요충분조건인가에는 이견이 있습니다. 마이카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가정에 차가 있어서 가족을 태우고 외식을 하는 경우 식당을 정하는 체크리스트에 주차의 편리함이 추가되었습니다. 출중한 맛집이라도 식당과 함께 주차장을 확보하지 못하거나 가까운 거리에 주차가 어려운 선택에서 밀립니다. 식당에 주차하고 곧바로 식탁으로 이동하고 식사후에는 바로 차를 타고 귀가할 수 있는 주차정 여건이 좋아야 만객운집입니다.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성 맛집에 갔습니다. 폭설이 내려서 길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검색한 맛집앞에 아내를 내려주고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식당은 달랑 3면의 주차장이 있을뿐인데 이미 다른 차량이 어렵고 버겁게 주차한 상황입니다. 그래도 인근에 이른바 공영주차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폐쇄되었습니다. 폭설을 치우지 못하고 막
언론보도를 보면 1907년 근대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후 117년 만에 가장 많은 눈이 쌓였다. 기상청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최대 25cm 이상 눈이 더 쌓일 것이라고 예보했다. 실제로 아침에 눈이 쌓인 그 위에 낮에도 눈이 내리더니 오후에는 바람이 불면서 살짝 물기를 머금은 눈을 뿌렸다. 차를 몰아 고속도로를 달렸는데 2차로 중 추월차로는 눈밭이고 주행차로만 열려서 모든 차량이 서행하며 앞차를 따라간다. 고속도로에서 지방도로 나가는 비탈면에서 작은 트럭 2대가 미끄러운 눈길에 고전을 한다. 그 뒤로 수십대 차량이 정체다. 그 뒤편에는 몇 대가 더 대기중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달려서 목적지 주차장을 통과하는데 미등록, 미확인차량으로 뜬다. 아차!~!!, 고속도로를 달릴 때 습기찬 눈이 번호판위에 달라붙었다. 주차를 하고 차앞으로 나가보니 두춤한 눈덩어리가 번호판을 감싸고 있다. 공기가 통하도록 마련된 라이트 부근도 눈으로 메워졌다. 회의를 마치고 주차장에가서 차량을 살폈다. 방금 세차를 한 듯 새 차가 되었다. 지붕과 문고리, 번호판에 달라붙은 눈이 모두 다 녹아내렸다. 남은 물기로 검은차가 반짝거린다. 시동을 걸고 조심스럽게 운행을 시작했다. 평소 30
지방의회는 광역단위 도의회와 기초단위 시군구 의회가 있다. 수원시, 안양시등의 구는 일반구의 구청장은 임명직 공무원이고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지 않는다. 서울특별시와 광역시의 구는 자치구라 해서 구청장을 구민의 선거로 뽑고 선거에 의해 구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경기도의회의 경우 대략 13개의 상임위원회를 두고 있다. 위원회별로 12~14명의 도의원이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경기도의회 의원중 공무원 경력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공무원으로 정년까지 근무하고 60세에 정년퇴직한 후 자연스럽게 시군의회, 시도의회 의원으로 진출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4년 임기의 의원에 공무원 퇴직자가 출마하여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펼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방자치법 제40조에 의하면 지방의원은 의정활동비 등을 지급받는다. 구체적으로는 의정(議政)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거나 이를 위한 보조 활동에 사용되는 비용을 보전(補塡)하기 위하여 매월 지급하는 의정활동비와 지방의회의원의 직무활동에 대하여 지급하는 월정수당, 그리고 본회의 의결, 위원회 의결 또는 지방의회의 의장의 명에 따라 공무로 여행할 때 지급하는 여비를 지급받는다. 인터넷 검색결과 2022년 경기도 의원은 월 554
오늘 문득 오래전에 발생한 황우석 박사님 사태를 기억해 냈습니다. 당시에 수억년 빙하속에 잠겨있던 매머드의 털이나 뼈에서 유전자를 꺼내어 다시 살아있는 매머드 후손을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카리스마있게 연구화동을 진행하는 모습이 방영되어서 우리 국민은 대한민국이 세계의 과학을 이끌어갈 미래 선도국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대략 35년전입니다. 아이들 나이와 비슷해서 기억을 합니다. 아이들을 담당했던 산부인과 의사선생님도 '황우석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의 집중포화로 황박사는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리고 30여년이 흐른 후 외국에서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는 기사를 본듯 여겨지는데 기억은 확실하지 않고 국내언론에서 더이상 황박사님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황우석 박사님의 근황이 궁금하여 검색을 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만났습니다. [황우석 박사 논문 조작 사건] 동물 복제와 줄기세포 연구 분야에서 인류 최초의 업적을 이루며 세계의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던 황우석 박사라는 인물이 2005년 11월 논문 조작 사건을 시작으로 연구 결과 조작, 연
1974년에 수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니 2024년에는 대략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20회 동문회 총무와 회장, 그리고 간부들이 봄부터 가을소풍을 준비하더니 수차례 문자와 전화를 해서는 반드시 참석하자는 격려와 독려를 받은 바이므로 동창회 밴드에 참석신청을 하고 당일 아침에 서둘러 수원시청 정문으로 향했습니다. 새로 이사온 바이니 걸어서 수원시청까지 가본 경험이 없는 터라 서둘러 달려가니 한시간이 남습니다. 그래서 88올림픽공원을 돌고 편의점에서 우유하나를 사서 마시고 다시 시청 건물을 구경하고 아침 모임시각 07:30분에 임박하여 버스정류장에 다가서니 낮익은 동창들 7명이 서있었고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10대 중반에 만난 친구이니 평생가는 친구이고 자랑스러운 수성고등학교 20회 동창입니다. 우주선을 발사하는 일도 아닌데 우리의 버스는 경기76아3489번을 달고 시청앞 정문에 다다르고 우리는 마지막번으로 버스에 올라 반가운 친구들과 악수를 했습니다. 차량번호를 적어대는 이유는 이분 관광버스 기사님은 지난 7년여의 행사에 늘 우리 20회 동문을 태우고 둥기둥둥 신명나게 안내하는 기사님이랍니다. 성격도 둥글해서 늘 긍정의 마인드로 친구들을 태워주었답니다. 세
시제란 음력 2월, 5월, 8월, 11월에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와 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를 의미한다고 사전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년시절부터 할아버지, 아버지를 따라가서 산소에 벌초를 하고 3일후쯤에 조금 마른 풀을 갈퀴로 긁어모아서 집으로 가져와 아궁이에 불태운 기억이 있습니다. 시제, 시향날에는 과일과 떡, 적과 전을 준비하여 선산으로 올라가서 조상님께 올리고 절하고 축문을 읽으시는 80세 전후의 어르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한때는 직계 5대까지의 조상님 벌초하는 일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시골 읍내에서 버스를 내려 비포장길 5KM를 터벅터벅 걸어가서 산 중턱의 여러곳을 오르내려며 산소의 풀을 깍는 일이 중노동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고조, 증조할아버지 산소를 우선 벌초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산소에서 작업을 하도록 진행해 주셨습니다. 어떤해에는 도시락을 가져갔지만 차라리 일찍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조상님을 모시는 벌초나 시제가 축제의 분위기가 아니라 부담스러운 업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해에 5대 문중이 의논
제복, 유니폼을 입은 군인이나 경찰을 만난 국민들은 이분들의 얼굴을 보기전에 계급장에 먼저 눈길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니폼은 계급으로 위계를 정하고 스포츠 유니폼은 동질감을 강화합니다. 조기축구 경기에서도 노랑조끼와 빨강조끼를 입도록 해서 상대방과 우리편을 구분하도록 합니다. 패스의 상대방을 빨리 찾아내도록 돕기위해 색상이 다른 조끼를 입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직사회 행정파트에서도 경찰관이나 소방관처름 어깨에 계급장을 달고 근무하면 어떠하겠는가 하는 농담을 한적이 있습니다. 공직자중 제복을 입는 분야에서는 내부의 위계가 있고 대외적으로 국민을 상대하면서도 어느정도 제복이 주는 권위로 압도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행정에 익숙한 주민들이 어느날 사무관 동장님이 무궁화 3개를 어깨에 달고 들이닥치면 말문이 턱하고 막힐 것입니다. 그러니 현행대로 군인은 별, 무궁화, 하사관, 병장의 계급장을 달도록 하고 소방관과 경찰관 역시 무궁화꽃 뭉치 8개든 5개, 4개, 3개를 달고 일하도록 해야합니다. 주무관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통합된 계급장을 달고 무궁화꽃을 피울 날을 기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소방이나 경찰의 경우 굳이 7급이하를 구분하는 것이 불편해서
1977년에 공직에 들어와 비봉면사무소에 근무했습니다. 당시에는 지방행정의 중심에는 새마을운동이 있었습니다. 면사무소 총무계의 고참 7급직원이 새마을운동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당시에 모친께서 동네 부녀회장을 하셨는데 면 새마을담당 선배님의 추천으로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하셨습니다. 1박2일 행사이고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당시 축사를 보니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1978년 행사의 축사내용중에는 '지난 8년동안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1천만건 이상의 새마을사업을 위하여 정부는 무려 9천700억원 이상을 투입했으며, 3천600만 우리국민 모두가 적어도 스물네번이상 사업장에 나가서 일한 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국에 투자한 새마을사업 1년 예산이 1조원이 되지 않는데 무려 큰 예산을 투입하였다고 연설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연설문중 비교가 될법한 말씀은 '호당 농가소득은 80년대초의 목표 140만원을 이미 작년에 넘어섰고, 금년에는 178만원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는 대목입니다. 기억하기로 1977년 9급 공원 월급이 5만원이었으니 연봉은 60만원. 4인가족이 140만원이니 대략 계산이 맞아가는 상황입니다.
1985년에 8급 4년차, 공무원 8년차로 근무했습니다. 왕성하게 먹고 마시던 27세의 청년시절이니 설탕커피, 요즘의 믹스커피를 많이 마셨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구내식당에 가서 100원짜리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식당 테이블에는 커피를 위한 설탕과 베트남산 야자수열매 가루로 만든 프림이 상비약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수한 커피맛에 익숙해지고 당시 평범한 말로 인이 박혀서 하루에도 여러잔의 커피를 걱정없이 부담없이 마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고희를 향해 달리는 나이에 이르고보니 음식에 攝生(섭생)을 합니다. 커피는 여전히 마시고 싶은데 '건강걱정증'으로 인해 마셔야하나 그만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기로에 찬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수십년간 익숙해진 커피를 한잔 더 마시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고, 그래도 오늘의 '커피총량'을 넘기는 경우가 많은 듯 생각이 듭니다. 500년 조선사에서 초기의 이성계, 이방원, 세종대왕의 식생활은 이후 영조, 정조대왕으로 이어지면서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조선시대 초기와 후기의 공통점을 들어보면 전기가 없었고 그래서 냉장고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커피도 조선에 들어오기 전입니다. 그렇게 긴 세
유명 게그우먼의 조크중에 본인은 “체끼라는 것을 모른다”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평소 맛있는 음식을 한상 차리고 동료들과 먹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방송에서 자주 보았던 바이다. 음식을 많이 먹어도 소화가 잘 된다는 의미와 함께 음식에 호불호가 없으며 모든 음식을 좋아한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살면서 과식하여 체한 느낌을 받지 않고 산다면 이는 행복한 일 중의 하나로 꼽을 만하겠다. 그래서 스스로 반성하며 생각해보니 살면서 '봉사의 행복'을 얼마나 느끼는가 반문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솔직히 남을 위한 봉사활동을 자발적으로 한 일은 없어서 하는 말이다. 좀 더 젊은 시절에 남을 위한 봉사에 나섰으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이 되었을까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 게그우먼이 체끼를 느끼지 못하듯이 봉사의 행복을 알지 못하는 삶을 살고있음을 자인하는 바이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공직생활중 1년 장기교육에서 몇번의 봉사활동에 강제로 참여한 것이 고마운 일이라 생각된다. 연수프로그램으로 최일도 목사님이 주관하시는 '밥퍼' 현장에 투입되어 전문가 선생님들과 채소를 다듬고 배식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점심을 위해 9시부터 채소를 손질하고 양파를 썰고 국을 끓이는데 힘을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