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팀장에 추천되다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2003년3월3일 오후 15시에 홍보기획팀장에서 언론담당으로 발령되었습니다. 언론담당은 도정홍보자료를 언론에 제공하고 언론인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운용하는 담당 사무관입니다.

홍보기획팀에서 4년간 근무하면서 3명 언론담당 사무관이 일하시는 모습을 잘 보았으므로 크게 참고가 되었습니다.

 

 

수륙양용이라는 군사용어가 있습니다. 육지를 달리다가 강이나 호수를 배처럼 건너가는 탱크를 말합니다. 공직에서도 주야겸용이 있습니다. 낮에는 언론인과 도정홍보를 추진하고 저녁에는 식사를 하고 소주도 한잔 합니다.

폭탄주는 술을 덜 먹기 위한 전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장군이 주재하는 술자리에서 장교들이 장군에게 잔을 집중하므로 장군이 일괄 폭탄주를 만들어 나누고 함께 마시면 동등하다는 계산입니다.

 

사실 폭탄주는 소주 한잔에 맥주 반잔이므로 알소주 3잔을 마시는 것보다 가볍습니다. 그리고 상호간에 친목과 소통을 다지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늦게까지 이어지면 여러가지 부담이 생기므로 늘 저녁 식사장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 출근을 생각해야 합니다.

언론인 중에는 술에 강하거나 약해서 아침에 늦게 출근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공무원은 아침 7시50분에는 사무실에 들어가야 뻘쭘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언론담당으로 가는 과정도 재미있습니다. 3분 선배 언론담당의 하루 일과를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상황을 이해하고 있던 터라서 언젠가는 나도 언론계장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번 3번으로 다른 분이 오시고 홍보기획팀장으로 4년을 보내고 보니 다른 부서의 빅10으로 평가되는 부서에 가서 팀장으로 일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한 그릇이 아닌 것이고 더구나 당시 경기도청 분위기에서는 공보관실 또는 대변인실에 근무하는 5급, 6급을 데려가겠다고 제안하는 순간 기자들로부터 야단을 맞을 것같은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요즘도 도와 시군에서 공보계장을 하면 언론인들은 일응 같은 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오라는 국장, 과장님도 없고, 더구나 인사라는 것이 내가 가겠다고 해서 가지는 것도 아니고, 제발로 가서 잘된 경우를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절에간 새색시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언론계장 하시던 사무관이 다른 부서로 이동하면서 자리가 났습니다. 언론인들이 이리저리 언론계장 적임자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나서는 후보자는 언론인들 마음에 차지 않았고 언론인이 추천하려 하면 도망가 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결국 기자들과 소통의 창구를 가지고 있던 어느 사람이 이강석 홍보기획팀장을 후보자로 천거하였지만 원로들이 단칼에 거주했습니다.

거부의 이유는 '말이 많아서 기자실 중요 정보를 위선에 시시콜콜 보고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하루가 지나도 후보자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원로기자들이 이렇게 애쓰시는 이유는 당시 손학규 도지사님께서 대변인과 언론담당은 기자실의 추천을 받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사부서는 3월1일자로 발표하지 못하고 이틀 후인 3월3일자로 인사발령을 합니다. 2월말 어느날에 원로 기자들이 기자실 난로가에 둘러 앉아서 홍보기획팀장(이강석)을 불렀습니다.

 

우리가 자네를 언론담당으로 추천하고자 하는데 의견을 말해보라 하셨습니다. 당돌하게 답했습니다.

“언론담당은 아주 중요한 자리여서 제가 간다고 가는 자리가 아니고 안간다고 안가는 자리가 아닌줄 생각합니다.”

"알았다 이 계장, 네 말의 뜻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언론담당으로 발령을 받고 4m거리의 옆의 옆자리로 책상 2개를 번쩍 들어 교체하는 특이한 자리이동을 하였습니다. 늘 쓰던 책상을 통체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으로 오산시청에 근무하면서 국장 4명의 인사 이동시에 입구 명패만 새로된 국장으로 바꿔 달고 그 방에서 다음번 국장으로 근무하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냈고, 그래서 각 국의 서무담당자들이 국장실을 이사하는 사역을 피하게 한 성공사례가 있습니다.

언론담당으로 자리를 옮긴 2003년 3월3일부터 일주일 후인 3월10일에 새로운 공보관이 오셨습니다. 정치권에서 활동하신 분이고 훗날 재선 국회의원을 하셨고 요즘에도 종편방송에 패널로 나와서 정치에 대한 토론을 하시는 분입니다.

 

민간이고 정치권 출신이시니 행정과 접목하는 과정에서 여러움이 조금 있었지만 행정이 그동난 비닐하우스 안에서 숨어있었다는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행정의 홍보는 주어진 여건속에서 자료를 전달하는 수준이었다고 감히 평가를 한다면 새로 오신 공보관의 업무스타일은 크게 공격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따라가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분이 다른 곳 다른 사람들과 우리도 모르는 도정홍보전략을 추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양하게 움직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홍보전략, 전략이 다른 홍보패턴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사건중의 큰 일은 경기도청 기자실 배치를 폐쇄형에서 개방형으로 바꾼 일입니다. 공보관의 강력한 추진방침에 따라 지방기자실 입구의 숨어있는 공간을 찾아내어 기존 기자실 책상을 배치하고도 남아서 중앙에 브리핑룸을 설치하였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브리핑룸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초기에 반대가 많았지만 강력한 힘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공보관이 새벽 꿈속에서 큰 깨달음이 있어서 일부 공간을 색다르게 꾸민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른 공보관이 오신 이후에도 홍보담당과 차석, 직원들은 공격적인 홍보를 진행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하여 2006년까지 3년간 공보관실 언론담당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보람을 얻었고 기자님들의 응원과 성원으로 꿈의 자리 지방서기관에 승진합니다.

 

공보관님이 서기관 승진을 축하단다면서 많이 힘들었다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답했습니다.

“공보관님 1970년대 서기관이면 군수입니다.”

과거에는 화성군수, 시흥군수, 평택군수가 서기관이었습니다. 1977년 공직 초임발령을 받을때의 윤영우 화성군수님도 서기관이었습니다. 이후에 오신 김기형 군수님이 서기관이었고 이후에 내무국장으로 근무하실때에도 서기관이었습니다.

 

8급, 7급일 때 서기관은 참으로 크고 높은데 막상 서기관 계급을 달고보니 한없이 작고 평범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 달리 보이는가 봅니다.

공직을 열심히 달리게 도와주신 선배 공무원, 여러 언론인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