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회고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저는 197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시골 고향의 이장님 권유로 그해 2월에 5급을류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현재기준 9급공무원입니다.

 

그리고 3월경에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서울 광화문학원을 다니던 5월에 화성군 비봉면 공무원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군을 마치고 다시 팔탄면으로 배속되어 1년간 근무한 후 경기도청 사업소인 농민교육원으로 1981년 8월10일에 발령받았습니다.

 

 

3년반 동안 농민교육원에 근무하면서 8급에 승진하고 보일러공사, 물탱크청소, 사감실 확장보수 등 몇가지 재미있는 일을 하다가 도청 새마을지도과 8급 서무담당으로 발령받아 2년간 일했습니다.

농민교육원 근무 중에 운전면허를 받아 차를 몰아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당시의 8급 직원의 중요 업무는 은행 파출, 영동시장 철물점, 기타 필요한 물품을 사오는 일입니다. 새마을교육, 농기계 교육생들의 주문을 받아 다양한 물품을 사서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농민교육원에서 새마을지도과로 가는 과정에 선배님의 추천으로 인사계 요원명단에 올랐지만 亂筆(난필)이라는 지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대신에 총무과와 같은 국 산하인 새마을지도과에 배속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후에도 늘 일단은 도전을 해보자는 좌우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안되면 원위치이니 한번 도전은 해보자는 것이 인생의 선택 기준이 되었나 봅니다.

 

새마을지도과에서도 내부 보고서를 만드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고 2년 후에 7급공무원으로 승진하여 세정과에서 2년간 일했습니다.

고등학교 3년동안 문예반에 들었던 것을 아신 선배의 추천으로 공보실에 발령되었습니다. 그래서 1988년 7월4일에 공보시에서 경인일보 '1도1사'체제에서 잠시 근무했고 곧이어 기호일보, 인천일보, 경기일보가 창간되었습니다.

 

여러개 지방언론사가 중앙언론과 경합하는 변화된 상황속에서 7급공무원이 자신의 잣대로 업무를 진행하였습니다. 당시 고참 사무관 계장님 조차도 지방언론사가 상호 경쟁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던 도청 행정상황에서 선취재 자료는 해당 기자님에게 양해를 구해서 풀자료로 풀거나 하루 나중에 보도자료를 배포하였습니다.

그리고 2년9개월동안 공보실 근무를 마치고 1991년4월24일에 대망의 6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공무원 입직 14년만에 6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공무원교육원은 현재의 인재개발원입니다. 최근까지 행정안전부 차관을 하신 분, 강원도 부지사를 하신분이 고시합격 초기에 경기도청 사무관으로 근무할때 그 부서의 차석, 6급으로 일했습니다. 1991년9월9일에 쌍둥이 남매가 태어났습니다. 6급 공무원 4개월 만에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8개월 후에 경기도청 도시국 도시개발과에서 일했습니다. 같은 조건에서 도청 부서로 발령받은 다른 두명의 주사는 공보실에 갔습니다. 하지만 직전까지 공보실에서 7급으로 열심히 뛰어다닌 이강석은 리턴발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요즘보다 부서 이기주의가 강하고 인맥이 부정적으로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입니다. 사실 공보실은 약간의 경험과 기술적인 역량이 필요한 곳이어서 전임자가 자주 복귀되는 부서였습니다.

결국 6급만 빼고 7급, 5급, 4급의 대대분 시간을 공보실에서 보냈고 11년 6개월의 공보부서 장기근속 기록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6급으로는 예산담당관실에서 물불 안 가리고 3년간 일했습니다.

 

5급으로 승진하여 다시 인재개발원으로 배속되었고 임관하여 동두천시 생연4동장으로 발령을 받아 100km를 내달려 갔습니다. 주변의 선배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머리 발령을 받았는가 걱정을 해 주셨습니다만 누군가가 도청 자리로 시군과 인사교류를 하는 것이고 그 자리에 내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동두천시청에 가서 생연4동장으로 발령받은 날부터 정우상, 임태수, 오천명, 김성곤, 김우정 등과 열심히 일하고 신나게 놀고, 동네 어르신들과 교류하였습니다.

 

2년간 동장과 사업소장으로 근무하고 소방재난본부 상황2담당으로 발령받아 소방업무를 익혔습니다. 1999년 공보실 홍보팀장으로 4년, 2003년 언론담당으로 3년간 일하고 4급 서기관에 승진하여 복지정책과장으로 일했습니다. 의정부 2청사에서 복지정책과장과 감사담당관으로 근무했습니다.

이후 2007년 지방혁신인력개발원에서 10개월간 장기교육을 받으면서 강의내용을 정리하여 자료집을 발행했습니다. 교육동기들에게 배부해 주었습니다.

 

2008년 1월 의회 공보담당관으로, 2009년 7월6일에 체육과장으로, 2010년6월30일에 대외협력담당관으로, 2011년1월17일 언론담당관으로 일했습니다.

동두천시청 생연4동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 어르신과 교류하였고 22년이 지난 2019년에도 지역의 80세 어르신들과 전화를 드리고 안부를 묻습니다. 그 결과 동장발령 13년이 지난 2011년6월27일에 동두천시 부시장으로 발령받습니다.

 

오세창 3선 시장님께서 동두천을 사랑하고 젊고 적극적인 인물로 낙점해 주셨습니다. 생연4동장에 이어 부시장으로 근무하게 되었기에 취임식을 하지 않았고 이임식도 생략하였습니다. 동장으로 근무할때 사무장, 계장님들이 대부분 사무관 과장, 서기관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두천시청 부시장 근무 6개월만에 교육파견 발령을 받았습니다. 부시장 근무 짧은 기간동안 또다시 수해가 발행하였고, 동장으로 근무하던 1998년 수해에 이어 두번째 재난을 만났습니다.

 

1998년에 수해가 나고 2011년까지 13년간 재난이 없었는데 제가 재난현장을 만난 것입니다. 제 잘못은 아니겠으나 주민들께서는 우연의 일치라면서 '다시는 동두천에 오자 마라' 농담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동두천시 주민들과 공무원을 만났습니다.

교육파견 2012년에도 열심히 강의를 들었고 두번째 연수 자료집 '강의시간에 받아적은 이야기'자료집을 발행하였습니다. 이 자료발간은 행정자치부 장관께 보고되었습니다. 통일부장관실에서 한 권 보냈습니다.

 

두번째 자료집을 언론에 보도하였기에 통일부장관 비서실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공보실에 근무하다보니 모든 일을 홍보에 연결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장기 파견 교육을 마치고 복귀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수도권교통본부에 다시 파견되었습니다. 서울 남대문(숭례문)인근에 사무실이 있고 경기,인천,서울 공무원 50명이 일하는 곳의 책임자가 되어 1년간 일했습니다.

 

이후 선배의 추천과 시장님의 승인으로 오산시 부시장이 되었습니다. 1년6개월동안 신명나고 보람차게 일했습니다. 시장님의 지원과 고교동문 후배 안민석 국회의원, 문영근 시의장, 이장수 사무국장, 신선교 과장, 박근성 국장 등 공무원 25명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론 오산시청 간부공무원, 후배 공직자들의 응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공직사에 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오산 부시장 18개월 후에 본청 보건복지국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북부청 균형발전기획실장으로 발령되었습니다. 2급자리에 3급으로 직무대리로 6개월을 근무한 후에 남양주시 부시장이 되었습니다.

시청 간부 두분에게 08:20분에 문자를 보냈습니다. 간단한 인적사항을 워딩하여 문자로 보내면서 함께 열심히 근무하고 싶다는 소박한 의견을 전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오전에 과장님이, 오후에 국장님이 시장님께 부시장 후보로 천거했다고 합니다. 부시장을 내부 간부가 천거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대부분 외부인사를 통해 추천하는데 이번에는 내부에서 올라왔던 것입니다.

여러가지 검토가 있었겠지만 남양주시부시장으로 발령되었고 당일에 인사위원회를 열어 승진발령해 주신 이석우 시장님께 감사드립니다. 1년 366일동안 열심히 일했습니다. 2016년1월5일에 부시장에 승진 임용되었고 1년만에 명퇴신청을 하였습니다. 2017년1월6일에 특별승진했습니다.

 

특별승진은 당해직급에서 1년이상 근무하여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도에서는 2017년 1월2일자로 인사발령을 발표했습니다. 1월6일로 명퇴를 준비하였는데 3일자이면 부시장 근무 362일로 3일이 모자라서 특별승진 요건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도 인사발령을 흔들 수 없으니 명예(특별승진)를 포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남양주시청 인사실무자가 도 인사과에 전화로 건의했습니다. 우리는 1월6일자로 준비하였으니 인사발령 일자를 조정해달라고 했답니다. 그리하여 특별승진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주변의 도움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이 공직 선배와 후배들의 도움입니다.

공직을 나와 추가로 근무하게 된 원장은 정관상 임기 3년입니다만 공무원에게는 정년 나이가 있습니다. 선배들이 물려준 부시장 승진 자리이고 실장이고 원장입니다.

 

과거 고위직에서 공기관에 취업한 후에 3년 임기를 고수하다가 후배 감사관들의 농도짙은 감사를 받은 후 명예스럽지 않게 그 자리에서 물러난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러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추가 근무기간 중에 사건이 발생한 경우도 있습니다.

2019년1월말에 도청 기자실에 인사를 갔습니다. 언론장학생으로 키워준 공직생활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마음속으로만 전했습니다. 이강석이가 홍보팀장으로 근무한 1999년 이래 20년 넘게 중앙지방을 지키는 분도 있습니다.

 

2006년 서기관 승진 때 힘써준 분들이 여러명 기자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현직에서보다 기자 면담이 평온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옛정으로 차 한잔 하면서 세상사 지나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기자분도 역시 불명예로 아름답지 못한 퇴직 선례를 말씀하십니다. 2년 임기를 복무하고 1년을 반납한 것은 정말로 잘한 것이라 칭찬합니다.

 

사실 그동안 면전에서는 임기를 채워야 한다고 말하는 동료들이 많았지만 결국 물러날 타이밍을 제때 잘 잡은 것입니다. 후배 중 승진 3명에게는 각각 33.3%의 승진 지분이 있다는 농담을 합니다. 훗날 밥한그릇 하달라 할 티켓이 있다고도 하겠습니다.

 

인생은 내리사랑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자식이 낳은 손자는 더더욱 소중하다고 합니다. 2019년 1월31일 아침에 공직 42년을 조용히 반추해 봅니다. 모든 분에게 감사하고 아내가 고맙고 아이들이 자랑스럽습니다. 2019년1월31일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