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2011년은 공직에 있어 격동의 시기입니다. 연초에 전격적으로 언론담당관이 됩니다. 공직에서 공보부서 11년6개월을 채워가는 6개월을 근무하였습니다.

당시에 신문사 유가부수를 측정하는 ABC제도를 바탕으로 상위랭크 언론사만 같이 가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고 그 바탕으로 지금의 경기도청 기자실이 운영되는 줄 압니다.

 

어찌하는 것이 정답인가는 알 수 없고 알아도 무의미한 역사속의 한 페이지가 되겠습니다만 저의 다짐은 모든 언론이 우리의, 행정의 벗이고 친구이고 후원자이며 응원단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언론은 多多益善(다다익선)입니다.

 

언론은 홍익인간의 정신을 구현합니다. 공무원이나 공기관 근무자들이 언론을 어려워하거나 불편한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업무를 비판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하지만 공무원, 공기관 임직원, 대기업 홍보실은 늘 독점적 위치에 있다는 점을 대오각성(大悟覺醒)해야 합니다. 我執(아집,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자신만을 내세워 버팀)과 獨善(독선, 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의 자세가 아닐런지 근신하고 염려해야 합니다.

 

좋은 표현으로 경기도가 행하면 표준이 된다고 합니다. 정말로 그런 사례가 많습니다만 당시에는 칭찬을 받았지만 훗날 원위치로 돌아온 정책도 있었음을 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추진한 행정업무가 무조건 옳다고만 주장할 논거가 미약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언론은 늘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모인 비판과 평점을 주업무로 하는 공적 기관으로서 우리사회의 木鐸(목탁 = 세상사람을 깨우쳐 바르게 인도할 만한 사람이나 기관의 비유)이고 公器(공기=사회의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공성을 띤 기관)입니다.

 

고등어를 숙성상태로 맛있게 보존하는 간잡이(생선을 소금으로 절임,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역할이 바로 언론의 기능인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면 모든 언론은 행정과 공기관에게 우군입니다. 언론은 우리를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손을 깨끗하게 씻어라, 일찍 일어나라, 어서 학교에 가거라,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선생님 말씀대로 해하라 하시는 부모님과 똑같습니다.

 

언론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공익이 무엇인가. 적재적소가 중요하다. 그것이 지름길이었나? 건물이 올라가면 그만한 그림자의 해소책은 준비되어 있나를 묻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론의 비판에 대해 행정의 성과가 90%이니 10%는 희생을 할 수도 있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정책결정을 합리화 했습니다. 하지만 그늘진 10%의 입장에서 말하고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이 담당자로서는 늘 불편할 것입니다.

 

따라서 언론이 비판하기 전에 스스로 10%이든 5%일지라도 지금의 우리 정책으로 인해 불편함을 당하는 어떤 무엇이 있고, 어떤 사람이 힘들어 함을 看過(간과 = 대충 보아 넘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독점적 행정을 집행하는 우리의 사명이라 할 것입니다.

흔히 아이들 싸움의 언어중에 너 잘되게는 못 해도 안 되게는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크든 작은 언론에서 비판하면 담배연기 바람에 날리듯 소리없이 번져 갑니다.

 

흐르는 물에 검은 물감을 풀어낸 듯 비판하는 기사는 빠르게 전파되고 신문활자 중에 잘 한다는 글보다 못 했다는 비판의 제목이 눈에 아주 환하게 잘 들어옵니다. 칭찬하는 말은 작고 연한데 욕하는 소리는 강하고 거칠게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역신문(주간)에 4단으로 난 기사가 지방지(일간)에 실리고 다시 중앙지 취재의 소스가 되더니 닷새후 월요일 아침에 방송기사가 됩니다. TV에 보도된 다음날에 신문에 나는 경우보다 신문기사가 방송뉴스가 되는 사례가 아주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언론과 가까워야 하고 신문방송, 주간지, 월간지와 친밀해야 합니다. 기관장 언론사 방문시에는 정치부는 물론이지만 편집부에 모시고 가야하고 방송사 마이크 기자도 중요하지만 카메라맨은 무조건 '감독'이라 최고수위로 소개해야 합니다.

 

2011. 1. 17일에 언론담당관으로 발령받아 격동의 시기를 지낸 후 6월 27일에 동두천시 공무원으로 전출되었습니다. 1997년 2월13일에 동두천시 생연4동장으로 근무한 이후 흐른 세월이 14년입니다.

동두천시 공무원으로 재발령된 이 부분에서 거듭 송구하게도 自畵自讚(자화자찬)이 첨가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올라온 [1998]년 스토리를 보시면 동두천시 생연4동장으로서 '깃발을 날리며 신나게 일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 당시에 존경하는 오세창 시장님은 4대 도의원(1996.7 ~ 1998.6)을 하셨고 임기를 마치고 2007년4월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시장에 취임하셨습니다.

저는 1997. 2월부터 1999. 2월까지 동두천시 동장으로 근무하였으므로 도의원 임기 이후에 수해가 나서 열일하는 모습을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강영시 생연1동장, 저 생연4동장, 신동복 상수도사업소장 등이 동료들과 함께 가족동반 체육대회를 하고 동장으로서 지금도 찾아뵙는 동네 유지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먼 발치로 보셨다는 가정을 합니다.

월남 파병되어 전투에 참여하고 귀국하여 예편한 예비군 앞에서 군대이야기 하는 것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의원 하신 후 잠시 다른 일을 하시는 오세창 시장님에게는 도청에서 낙하산(당시 시민들중에 그런 표현을 하신 분이 있음)타고 내려온 공무원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의 눈빛이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2010년 7월 제17대 동두천시장에 재선후 부시장 후보에 조금 시기상조라는 지적이 일었지만 주변의 반대를 극복하시면서 전격 추천하셨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동두천시청 동장으로서 근무한 경력을 높이 평가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1998년 수해이후 太平聖代(태평성대)였던 동두천시에 2011년 또다시 폭우가 내려서 침수피해를 입었습니다.

 

1998수해는 신천물이 범람하여 천변주택이 친수된 것이고 2011년에는 일시적인 폭우가 신천으로 나가지 못해 주택이 물에 잠긴 것입니다. 신천이 범람한 1998에는 모든 가구, 그릇에까지 검은 흙이 들어왔고 2011년에는 내수, 즉 빗물이 방안으로 창고로 들어온 침수피해를 입었습니다.

침수피해를 입으면 참으로 힘이 듭니다. 모든 家財道具(가재도구)가 젖어버리고 나무로 만든 가구는 마르면서 틀어지고 금이 가서 버려야 했습니다. 자영업자는 한달이상 영업을 못하고 공장 생산라인이 서버리는 피해도 마음아픈 일입니다.

 

한 달여 수해복구를 마치고 생연4동 주민들과 점심을 먹는데 한 말씀 들었습니다.

“이제 동장님(부시장인데 동장님이라 하심)은 다시는 오지 마시오. 당신이 오기만 하면 수해로 침수 피해를 입는단 말이요.”

사실 제가 와서 수해가 났다고 한다면 제 직업을 기우제 제관, 환경관리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밀한 마음에 허허허 하면서 농담으로 던지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매년 2~3번 동두천시 생연4동(지금은 중앙동)에 가서 점심을 먹습니다. 3선 시장을 명예롭게 마치신 오세창 시장님의 퇴임식에도 전직 부시장 자격으로 부부가 객석에 앉아 수고하신 시장님 내외분께 큰 박수를 보내드렸습니다.

2021년 8월에는 지인의 98세 모친상에 다녀왔습니다. 80대 초반의 아들이 조문을 받습니다. 장거리 운전이지만 보람차고 행복하게 다녀왔습니다. 지금도 동두천에 대한 애정은 가득합니다. 동두천을 사랑하는 경기도민이 한명 여기에 있답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