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0살 소년의 마이크로버스 탑승기

요즘 출근하는 시청이 있는 남양을 지나 비봉면 양노3리, 이른바 '늘무니'를 지나서 '국개장터' 비봉면소재지를 지나 수원역을 거쳐서 장안문 밖으로 달리는 마이크로버스를 시골 어르신들은 합승이라 불렀습니다.

 

같은 길을 달려 비봉에서 안산을 거쳐 서울로 가는 머리에 붉은 색을 칠한 대형버스를 그냥 '버스', '뻐스'라 호칭했습니다.

 

1968년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한 초여름 어느날에 아버지, 어머니, 둘째형과 4명이 합승에 올랐고 급히 출발하자 깜짝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부모님 두분은 막내아들의 당황하는 모습에 크게 놀라기도 하면서 동시에 창피하고 쑥스러웠다고 회고하십니다.

 

고모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랬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버스가 출발하니 안전하게 바닥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골에서도 마치를 타면 바닥에 앉고 리어카 역시 편안하게 앉아서 갑니다.

 

그러니 더 비싼 고급의 마이크로 합승버스 바닥에 앉는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합승에는 의자가 있습니다.

 

구멍이 뚫린 비닐의자가 여러개 있고 승객이 많아도 뒤로가면 빈자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승차한 합승이 출발하자 옆에 서있는 전봇대가 뒤로 밀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시골에서 도심에 처음 나와 합승이라는 버스를 타고 전기불이 번쩍거리는 수원시 영화동으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주변은 어두워졌고 전봇대와 미루나무 가로수도 끊임없이 뒤로 밀려갑니다.

 

어둠속에 한여름 반딧불이가 차창에 밝은 줄을 그으며 지나갑니다. 1968년 수원시 입구 오목천거리에도 반딧불이가 살았습니다.

 

이제 반딧불이는 수원 광교산 깊은 계곡에서 발견된다 해서 야단법석입니다만 한밤중에 몇번 광교산을 다녀왔지만 계절이 맞지 않아서인가 아직 그 반딧불이를 상면하지는 못한 바입니다.

 

언젠가는 반딧불이를 만나고 싶습니다. 반딧불이 화장실은 여러번 방문했지만 화장실 주인인 반딧불이는 그 공간을 지키지 못하고 더 깊은 계곡으로 숨어 들어간 것 같습니다.

 

합승버스는 수원역 철길을 지나갑니다. 여러번 울퉁불퉁 거리면서 좌우로 흔들거리며 지나간 후 다시 평정을 찾습니다. 지금의 수원역 광장을 지나 매교동으로 진입하자 휘황찬란입니다.

 

돌출간판이 가득한데 그 좁은 길로 버스가 지나갑니다. 지금의 도로가 아니라 구도로를 가는 것입니다. 버스 두대가 겹치면 돌출간판 한두개를 버스 조수가 들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터키 여행중에 바자르를 방문하면 옷가게가 가득한 길로 마차여행을 체험하게 됩니다. 관광객을 태운 마차가 옷을 한가득 진열한 길을 갑니다.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은데 이 길을 마차가 지나가므로 상인들은 진열된 옷을 매단 장대를 안으로 당겨서 마차가 지나가도록 합니다.

 

세조의 어가 연을 지나가도록 가지를 들어올려 정2품 장관벼슬을 받은 '속리산 정2품송'이 있습니다만 터키의 바자르 상인들은 하루에서 수십번 옷 진열장대를 들어올리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여행당시에 마음속 추론은 수백년전에 마차가 지나던 길가에 옷가게 상인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장사가 잘되니 이곳에 모였는데 이전부터 다니전 마차에게 우선권이 있으므로 상인들이 옷감을 들어올려서 마차의 통행을 도왔다는 추론입니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말을 합니다. 한두채 한옥을 짓고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마을에 아파트가 건설되면 주민들의 징과 북소리, 마이크 쇳소리에 조상님 산소가 밀려나고 한옥조차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이 옵니다.

 

다수의 힘은 법을 만듭니다. 뗏법이라고 합니다. 다수의 힘으로 도장을 찍고 징과 북을 치면 기존의 작은 권리는 사라지고 새로운 권력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심을 지난 합승버스는 야경에 자태를 뽐내는 팔달문(남문)을 지나 조선최대의 장안문(북문)을 거쳐서 버스종점인 영화동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처음 만난 전기불과의 추억을 회상했습니다. 아마도 30촉 전구를 처음 본 것은 1964년경입니다. 초등학교, 국민학교 들어가기전에 비봉면 자안2리, 방아다리에는 3줄짜리 전기선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삼광영화사가 무성영화를 틀었고 조금 지나서는 입과 오디오가 맞지 않는 메아리치는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동네 아가씨들은 쌀독에서 반말을 자루에 담아이고 살가게에서 쌀을 삽니다.

 

당시에 시골마을에서 '쌀을 산다'는 말은 쌀을 주고 돈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쌀을 돈을 주고 사오는 것은 '쌀을 팔아온다'했습니다.

 

나중에 철이들어 어른들께 여쭈었지만 그냥 그러하다 말씀하셨습니다. 더 세월이 흘러 학자님으로부터 들은 바는 농경사회에서 쌀을 거래한다는 것이 송구한 일인데 어쩔수없이 쌀거래를 하게 되므로 이를 반대로 표현한 것 같다 말씀하십니다. 공식적이지 않은 비공식적인 쌀거래이니 이를 반대로 표현한 것 같다 설명해 주십니다.

 

처녀들은 쌀을 주고 돈을 받아서 영화표를 삽니다. 시골처녀중 멋쟁이는 양조장집 딸, 방앗간집 딸, 그리고 지주의 아들이 멋장이였습니다. 현금이 돌아가는 집이고 땅이 많으니 먼자락부터 한필지, 두마지가 팔아서 도시에 유학을 가거나 동경유학생이 되었다 합니다.

 

동경유학생은 일본에 가자마자 돋보기를 하고 이를 멋지게 쓰고는 시골마을에 와서 으시댔습니다. 그리하여 어른들은 1974년 고등학생 1학년이 되어 검정테 안경을 쓰고 방학을 맞이하여 시골마을에 잠시 귀가하자 안경을 벗으라 하십니다.

 

정말로 시력이 맞지 않아서 교정하는 안경일뿐인데 1940년대 일본 동경대학교 유학생의 사치인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 상업선생님으로부터 같은 말씀을 듣고서야 일제시대 안경이 겉멋이고 건방진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80세가 넘으셨을 상업선생님은 교수님 타입의 안경을 쓰셨는데 당시에 교장선생님 앞에서는 안경을 벗고 인사하고 대화를 했답니다.

 

영화내용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상영후의 경품추첨이었습니다. 영화사 사장님은 손재봉틀을 경품으로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품은 여러날 영화를 상영하고 경품을 뽑았지만 당첨되지 않는 '쇼윈도우 부부'와도 같습니다. 그냥 보여주는 경품일뿐 누구도 롯또당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반면 추첨을 하면 플라스틱 바가지가 당첨되었습니다. 혹시 시세보다 비싸게 물건을 사거나 얻어 먹으로 갔다가 오히려 밥값을 치루는 경우에 우리가 '바가지를 썼다'고 하는데 재봉틀을 경품으로 받으려 기대했다가 플라스틱 바가지를 타게되는 경우를 보고 그리 표현한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거즈 손수건을 두르고 검정 고무줄로 묶은 마이크를 든 사회자를 '변사'라고 했습니다. 변사는 무성 영화시대의 영웅이었습니다. 화면을 보면서 외칩니다. "(심)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반지가 그리도 좋더냐?"

 

사랑에 속고 돈에 속고 사람에 속는다는 등 다양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변사는 말재주꾼, 재담꾼이었습니다. 해설을 하고 독백을 하고 외치고 울고 웃는 말로 사는 이 시대의 문화적 광대입니다.

 

영사기를 돌리고 피복이 벗겨진 마이크 줄을 통해 쇳소리를 토해내는 영화사의 영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기가 들어와야 했습니다. 무겁기가 대표격인 배터리를 이용하거나 시동이 걸린 트럭에서 전기를 빼내어 영화를 돌리기도 했습니다만 당대에 3줄 동력선에서 트랜스로 110볼트를 만들어 영화를 상영하던 비봉면 방아다리의 추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청룡초등학교에서 시동걸린 트럭에서 전기를 끌어내어 돌려주는 영화를 본 기억으로 훗날에 중국에서 살아있는 곰의 슬개를 링거줄로 뽑아내는 뉴스를 보고 두 사건을 연상하기도 했습니다.

 

빈대의 간을 내어먹을 일이라는 비판처럼 트럭에서 전기를 빼내고 곰의 쓸개에서 쓸개즙을 뽑아내는 등의 일들이 어린 마음에는 안스럽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수원시 영화동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입니다. 주택이 가득한 영화동의 1968년은 배추밭이었습니다. 지금의 영화동사무소 주변의 배추밭에서 고무신에 벌을 잡아 빙빙 돌리는 놀이를 하면서 놀았습니다.

 

시골마을 밭이나 영화동 땅이나 같은 토양이었습니다만 수십년이 흐른 지금의 땅들은 금덩이와 돌덩이가 되었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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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