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금 중 효성을 상징하는 분은 정조 대왕이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임금에 오르지 못한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아들이다. 장헌세자와 정조의 능은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있다.
왼쪽의 융릉은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와 동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고, 오른쪽의 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와 동비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장헌세자의 능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당시에는 양주의 배봉산)에 있었으며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정조 13년(1789)의 일이다.
그후 한 해에 수 차례씩 아버지의 능참길에 올랐던 정조는 때때로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비오는 날에는 ‘아버지가 얼마나 추우실까’라는 생각에 사람을 시켜 무덤에 가 보게 했더니 전날밤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능참봉이 능 앞에 엎드려 있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정조가 부친의 묘소를 옮긴 후 능 주변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식, 솔잎을 갉아 먹는 것을 보고 진노해 송충이를 잡아 입에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 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고 꾸짖고 돌아서자 갑자기 천둥번개와 장대비가 쏟아져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수원시내 고등학생들이 보여주고 있는 정조대왕 능행차 모습은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한다. 그리고 당시 어가(御駕)가 오갔을 길에 서있던 소나무들은 200년 성상을 버티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수원시 파장동과 의왕시를 가르는 고개(옛명칭 : 미륵당 고개)가 있는데 그 이름이 지지대고개다. 지지라는 말은 지연된다, 지체된다는 의미인데, 정조의 능행차 어가가 한양에서 융능을 향해 내려갈 때에는 “왜 이리 가마가 느린 것이냐!”면서 행차길을 재촉하였고 한다.
그리고 환궁길에 이 고개에 다다르면 정조왕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뒤를 돌아다보므로 교꾼들의 발거름 또한 더뎠다고 한다.
그래서 멀리에서나마 한번 더 바라보기 위해 돌로 대를 쌓았고 그 이름을 "지지대(遲遲臺)고개"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조부 영조(英祖)의 뒤를 이어 왕조의 부흥에 나섰던 정조는 아버지를 비운으로 몰고 간 당쟁을 종식시키고 새 국가 건설을 위해 화성(華城) 천도를 꿈꾸었지만 그 염원이 채 결실을 맺기 전 49세에 급서(急逝)하였다.
지금 융건릉을 왼쪽에 두고 1.7㎞쯤 들어가면 숲으로 둘러싸인 절이 나오는데 선친의 무덤을 옮긴 다음 해에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려 크게 중수한 용주사다.
대웅전에 걸린 ‘대웅보전(大雄寶殿)’이란 글씨는 정조의 친필이라고 한다. 후손들도 정조왕의 효심을 계승해 가기 위해 고개 옆에 효행공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정조의 동상을 세웠다.
민복차림으로 민정을 살폈던 정조이기에 동상은 한복에 갓을 쓴 모습이다. 또, 수원시에서는 매년 정조 대왕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 선발대회를 개최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경기도와 수원시에서는 내년 9월 27일부터 10일간 세계 효문화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어버이 친(親)자를 풀어보면 장에 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고개 위에서 기다리던 어머니가 그래도 궁금하여 조금이라도 멀리 보기 위해 나무(木) 위에 올라가(立) 바라다 본다(見)는 뜻이라고 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기 위해 미륵고개 위에 돌을 쌓고 바라다보았던 정조 대왕의 효심과 고개마루 나무 위에 서있는 애타는 어버이의 마음을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과 함께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