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진도 가족여행

  • 등록 2025.05.10 15:4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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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아침을 서둘러 차에 여행짐을 한가득 싣고 진눈개비가 내리는 수원을 출발하여 충청에 이르니 눈이 그치고 구름이 적정하니 하늘을 가린 남부지방 날씨가 이어집니다. 지금 강원도에는 폭설이 내렸다고 하니, 한반도가 넓다는 사실은 실제로 차를 운전해서 여행을 할 때에 확실히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함평 휴게소에서 점심으로 순두부찌게를 먹고 목포 1일차 숙소에 도착하여 많은 짐을 풀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여행짐은 나름 짜임새가 있고 특히 식사준비에 철저합니다. 가능하면 냉장고를 활용하면서 여러끼니를 자율식사를 합니다. 아이들도 이에 익숙해졌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 짐을 많이 가져갑니다. 기본 반찬도 준비하고 옷도 여러벌 가져와서 다양하게 입고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들도 여행을 가면 이정도 짐을 가져가야 하는 줄 압니다. 엄마의 스타일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부부다 닮아가고 자식이 부모를 따라오는 경우가 많습니. 다만 여행짐은 아내는 많이, 남편은 최소화입니다.

 

우리사회의 사람들은 대부분 여행을 가면서 핸드폰, 지갑을 들고 갑니다. 수첩 한 권만 고 가는 여행객도 많을 것입니다. 반면 우리 가족은 여행 첫날이나 다음날 조식, 석식을 숙소에서 먹습니다. 2일차에도 김치는 냉장고에 저장하였다가 먹고 잘 익으면 끓여서 김치찌게로 먹습니다. 다른 재료를 넣으면 멋진 국물을 갖춘 탕류로 변모시키는 기술이 있습니다.

 

여건이 좋은 숙소에서는 쿠크 밥솥에 밥을 해서 카레라이스를 먹고 과일을 깎아서 간식으로 먹으면서 여행을 합니다. 마지막날에도 집에서 가져온 장기 저장식품을 먹습니다. 캔에 저장된 음식, 비닐에 포장된 장기저장 가능한 음식을 활용합니다. 주식이 되는 밥은 쌀을 불려서 전기밥솥을 이용하여 취사하고 사각김 등 다양한 식재료를 반찬삼아서 콘도방에서 먹습니다.

 

잠옷도 준비하고 갈아입을 옷도 여러벌입니다. 그리고 숙소에서 주는 소품도 열심히 쓰고 남은 것은 가져갑니다. 태국 여행가서 받은 슬리퍼를 3년째 집에서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큰돈이 된다기 보다는 재미인것 같습니다. 비용을 지불한 것이니 가져가도 되는 물건입니다. 그렇다고 자장면 먹고 그릇을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탕수육 먹고 그 접시도 반드시 식당에 두고 옵니다.

 

[해설] 어메니티란 투숙 고객에게 제공되는 무료 욕실 소모품 및 서비스 용품을 말한다. 호텔별로 어메니티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어메니티는 호텔을 선택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런 여행객들의 니즈에 따라 호텔 어메니티도 점차 진화하고 있다.

 

[사전] 어메니티 (amenity) [자연 일반 ] 어떤 지역의 장소, 환경, 기후 따위가 주는 쾌적성. 아름다운 경관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따뜻함을 포함하는 미(美), 감(感), 쾌(快), 청(靑)으로 표현될 수 있다.

 

저가 호텔이지만 가끔 이용하면서 어려운 영어단어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출장을 가면 휴지, 면봉, 빗 정도가 비치된 장급 여관에 투숙합니다. 동료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함께한 반주의 연장선상에서 숙소에 들어와 편의점이 없던 시절 마트에서 구매한 소주와 마른 오징어로 2차를 하고 12시경에 내일의 일정을 걱정하면서 그 자리에서 잠자리에 듭니다.

 

아침에 부시시 일어나서 황태해장국집의 뜨거운 국물로 속을 푸는 것인가 지지는 것인가 몰라도 그렇게 아침을 황급히 먹고 회의에 참석한 기억이 날 뿐입니다. 세월이 흘러서 요즘 중급 호텔에서 제공되는 어메니티는 삶의 쾌적성을 증진시키는 단계를 지나서 고객감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은 소품으로 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호텔 경영에서는 아주 큰 수익성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 어메니티를 수집하는 아름다운 취미가 생겨난 우리 가족입니다. 특히 아내는 비품과 소모품의 정확한 감별사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비닐포장 용품은 어메니티로서 쓰고 남으면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가 머리를 말리는 드라이기는 천으로 만든 자루에 담아서 옷장에 비치했습니다. 옷장의 옷걸이도 가져가서는 안되는 품목이랍니다. 컵, 커피포트, 구두헤라, 리모컨 등이 비품입니다. 2박3일간 쓰고 제자리에 두고와야 합니다.

 

아내는 주방의 모든 비품을 열심히 쓰고 마지막날에 깔끔하게 설겆이하여 제자리에 둡니다. 접시는 빡빡 소리가 나게 세제로 닦고 물로 헹거낸후 마른 수건으로 닦아서 깔끔 반짝하게 정리해 둡니다. 이는 과거 관사를 나올때마다 했던 신성한 전통과도 같은 일이고 아내를 자랑하는 목록 상위에 적혀있습니다.

 

어메니티를 나름 해석하면 숙박중에 쓰고 버려도 되는 물품입니다. 그러니까 탕수육을 주문했는데 그냥 손바닥에 줄 수 없어서 접시에 담아주는 것이지 접시도 손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해석하변 됩니다. 그것을 알기에 그릇 등 각종 호텔비품은 그 자리에 온전하게 잘 두고 옵니다. 

 

지난번 모임에서 국장님이 해외에서 가져온 과자 한박스를 열어서 7명에게 나눠주셨습니다. 플라스틱 박스와 봉투가 남기에 이를 일식집에 두고올 수 없어서 집으로 가져와서 철저하게 재활용했습니다. 플라스틱, 종이로 구분해서 배출했습니다. 자원을 재활용하는 것은 국민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식집 종사자가 자신들의 어메니티가 아닌 종이, 플라스틱을 발견하면 우리 방 손님을 낮게 평가할 것이기에 그리 한 것입니다. 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고 걸어 나와서 영산강 줄기 아래에 자리한 갓바위를 방문하였습니다.

 

[해설] 갓바위는 영산강 하구의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바위로 2009년 4월 27일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되었다. 해식작용과 풍화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풍화혈로서 마치 삿갓을 쓴 사람의 형상으로 보인다 하여 갓바위라 불리운다. 이곳은 예부터 입암반조라 하여 목포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현장에 설치된 게시판에서 적은 갓바위 전설입니다.

 

[해설판] 아주 먼 옛날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살림살이는 궁핍하였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착한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으나 주인이 "품삯을 주지 않아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손과 발은 이미 식어있었다. 젊은이는 한 달 동안이나 병간호를 못한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저승에서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바른 곳에 모시려다 그만 실수로 관을 바다 속으로 빠트리고 말았다. 불효를 통회하며 하늘을 바라 볼 수 없다며 갓을 쓰고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훗날 이곳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바위' 라 하고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 라고 불렀다. 또 한 가지는 부처님과 아라한 (번뇌를 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성자)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날 때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바위가 되어 이를 중바위(스님바위)라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저녁 식사 메뉴는 떡갈비, 육회, 냉면 맛집을 검색해 두었지만 생각하기보다 가격이 높아서 호텔 카운터의 안내를 받아 콩나물국밥집으로 갔습니다. 부부는 콩나물국밥을 주문하였고 현재는 돼지국밥, 현아는 갈비만두를 달라 해서 맛나게 먹었습니다. 국밥 4,500원은 목포여서 가능한가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일요일 오후이기는 하나 시내에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거리에도 그렇고 관광지에서도 사람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국적인 현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중부권에서는 그래도 사람들을 많아 보게 됩니다만 한반도 땅끝 목포는 상황이 다른 듯 보입니다. 정치인들이 나라걱정을 하면서 국민들의 경제도 걱정해야 하는 시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2일차에 팽목항 인근을 지나서 진도 솔비치에 도착했습니다. 80km이상을 달려서 도착하여 객실 접수를 위한 번호표를 뽑았습니다. 요즘에는 핸드폰번호를 입력하면 카톡으로 접수를 알려주고 오후 1시경에 다시와서 객실을 신청하고 다시 나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다니다가 3시경에 입실이 가능합니다. 1101호.

 

거참, 바다가 보이는 1101호를 받기 위해 하루 12,000원을 더 내야 합니다. 그냥 신나게 이리저리 놀다가 밤 11시에 숙소에 와서 웨이터가 주는 키를 받고 들어가 푹자고, 쿨쿨 잠자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진도주변을 관광하면 될 일이 아닌가요.

 

젊은이들의 여행은 다릅니다. 과거 세대는 숙소는 잠자고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알지만 요즘에는 숙소가 곧 관광의 중심축이 됩니다. 저녁 숙소를 원하는 층, 오션뷰로 받기 위해 아침일찍 달려가 번호표를 뽑고 다시 돌다가 와서 기다려서 카운터에 방을 신청하고 다시 나가서 점심을 먹고 숙소 오픈시각 3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텔에서 보내는 바카스를 호캉스라 합니다. 밖에 나가지 않고 오직 호텔방 안에서만 보내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4인 가족이 호캉스를 할 일은 아니고 그냥 기성세대의 여행과 젊은이의 호캉스를 조화시키는 여행전략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니 노소간의 여행에 대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어른들은 밖에서 이리저리 구경을 하고 식사를 한 후에 소주 한잔 하고 숙소에 들어가 잠자고 나와서 다음 여행지로 갑니다. 어디에서 잠을 잤는가는 침대만 기억납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어디에서 묵었는가가 중요한가 봅니다. 사진을 찍어서 친구에게 자랑하고 SNS에 올립니다. 다른 친구들이 먼저 다녀온 관광명소에 대해 경쟁적으로 사진을 올리고 다른 친구보다 더 흥미로운 숙소를 다녀왔다는 것을 자랑해야 하고, 좀 더 명소를 많이 찍었음을 자랑하고자 하는 듯 보입니다. 진도에 사니 진도개입니다. 진도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1994년 신문 기사로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돌아온 백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백구'는 전라남도 진도, 신면에 살던 진돗개의 잡종견 이었습니다. 당시의 시골 사람들은 강아지를 사고팔아 식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백구'를 키우던 주인 박복단 할머니께서 대전의 한 개 도매상인에게 팔았는데 이 '백구'가 대전에서 빠져나와 진도로 다시 돌아온 기적과도 같은 사연이었습니다.

 

대구에서 백구가 살던 진도 의신면 까지의 거리는 283.4Km, 자가용을 이용한다면 3시간 25분이 걸리는 엄청난 거리입다. 인간도 되돌아오기 쉽지 않은 이 거리를 동물인 강아지가 스스로 되돌아왔던 이 사건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1993년 3월에 대전으로 팔려가서 1993년 10월에 진도 고향으로 되돌아 온 '백구'. 대전에서 목줄을 끊고 탈출한 '백구'가 장장 7개월이란 기간 동안 고향으로 달려왔습니다. '백구'가 돌아왔을 당시, '백구'의 상태는 음식도 제대로 못 먹어서 굉장히 메말랐으며, 다 죽어가기 직전의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와 백구의 석상을 세우고 진돗개의 충심과 사랑을 후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진도군청 직제에는 진도개과가 있어서 별도로 지은 사무실에서 공무원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신비의 바닷길 이야기입니다.

 

삐에르랑디 주한프랑스 대사는 1915년생으로 1971 ~ 1975년에 한국에서 대사로 근무했습니다. 1975년에 진도개를 연구하기 위해 진도에 왔다가 진도 해안에서 바닷길이 열리는 현상을 목격하고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신문에 소개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부각되는 계기를 제공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역 어르신께 여쭈어보니 음력으로 바다가 갈라지는 시기가 있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검색을 통해 구체적인 설명을 들었습니다. 2023년 계묘년에도 신비의 바닷길은 3일간 열린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3월 22일, 23일, 24일)

 

여행은 스케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오전 08~14:00까지 숙소에 가서 순번 등록하고 어설프게 구경갔다가 다시 숙소에 와서 배정받고 다시 점심먹으러 나갔다가 돌아와서 방키 받아서 짐을 옮기고 풀어서 오후 시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루를 숙소 받으로 오가다가 지쳐서 오후시간에는 숙소에서 본의아닌 호캉스를 하고 있습니다.

 

저녁시간. 우리 부부는 식사준비를 잘 합니다. 점심은 일반 식당에서 전복죽, 꽃게비빔밥을 먹었습니다만 저녁식사는 숙소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집에서 가져온 쌀로 밥을 하고 김치, 카레, 된장찌게, 연근, 오징어채를 바탕으로 성찬을 즐겼습니다.

 

이제 저녁시간에 싸우나탕에 갑니다. 엄마들은 싸우나탕을 가는데 짐이 한섬입니다. 아빠들은 그냥 치솔하나 들고 갑니다. 엄마가 준비해준 짐은 정성을 생각해서 가져갑니다만 가서 쓰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다시 가져오면 하나 둘 사용여부를 점검합니다.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듯이 남편을 관리합니다. 그래서 때밀이 하나정도는 살짝 물에 담가서 슥슥 쓰고 젖은채로 비닐봉지에 담아서 돌아옵니다. 그러니 젖으면 안되는 다른 품목 어메니티에 물기가 젖어서 다음에는 쓸 수 없게되는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목욕가방에 젖어서는 안되는 품목은 거의 없습니다. 면봉은 오늘 젖으면 다음번에 쓸 수 없으닌 조심해야 합니다.

 

아침 일출을 11층 숙소에서 바라보고 해안가를 돌아 아침운동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해안가의 맑은 모래가 멋지고 자연스럽게 자라는 나무가 아름답습니다. 남해안 해안선의 자연스러움이 부럽습니다. 초등학생때 배운 리아스식 해안입니다. 사전에서는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을 설명해 줍니다. 해안선의 형태가 복잡한 해안 중 그 형성원인이 하천에 의해 침식된 육지가 침강(沈降)하거나 해수면이 상승함으로 인해 형성된 해안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부분 다른 집 엄마들은 말합니다. 여행은 먹는 맛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모든 끼니를 식당에서 먹습니다. 돈은 남편, 아빠가 내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집 식구들은 리조트 방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여행경비 줄인 것을 즐거워 합니다. 하루 두번, 아침과 저녁을 주방에서 차려먹습니다. 갓 지은 쌀밥을 조각김에 올려서 싸 먹는 맛이 있습니다. 충무김밥 방식입니다.

 

솔직히 숙소에서 밥해먹으며 경비 줄인 것을 즐거워하려면 왜 힘들게 이곳까지 왔을까 반문해 보기도 합니다만 그속에서 여행의 보람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색다른 가족인 것입니다. 그런 자랑을 이렇게 글로 표현해도 슬프지 않은 부모이고 자녀입니다.

 

오늘 송가인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농촌마을 딸이 가수가 되어서 송가인의 생가가 엄청난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송가인 공원이 조성되었고 송가인 길이 지정되어서 교통표지판에 "송가인길"이라고 관광지 안내판이 붙었습니다. 수원에 박지성길, 대구의 송해공원 등은 당사자 생존시에 마련된 명소입니다. 송가인 가족의 집앞에 도착하니 농산물판매장이 보이고 까페도 있습니다. 주변의 집에서 지역주민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합니다.

 

그녀는 고향마을 주민의 직업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까페도 보이고 주인은 없지만 농산물 판매 부스가 여러곳 보입니다. 송가인 생가인 부모님의 집앞에는 다양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관광객이 사진을 찍을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침 다른 관광객이 없으므로 길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포즈로 멋진 사진을 찍었습니다. 집안에 인기척은 들리지 않고 자그마한 강아지 2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유명인의 집은 집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유명해서 그가 태어났거나 살았던 집을 구경하러 오는 것입니다. 집보다는 유명인을 보고 싶은 것인데 바쁜 일정으로 만나기 어렵고 그가 자주 집에 오지 못하므로 우리는 그가 태어난 집을 보고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가에 가면 그분의 역사와 발자취를 일부 볼 수 있습니다.

 

혹시 어떤 분들은 생가의 기를 받아서 자신도 유명해질 아기를 낳거나 손자손녀를 보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단 명소에 가면 그곳의 기를 느끼고 마음에 품게되며 이를 바탕으로 훗날 자신에게 참 좋은 일이 생겨날 것임을 기대하는 것으로 봅니다.

 

생가나 살았던 집을 방문한 기억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생가에서 시골집에 있었던 책상과 90% 유사한 것을 발견하고 선친의 세대와 유사한 시기였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평범한 시골집 아들로 태어나서 일본 군대를 가고 해방을 맞고 정치적 격변기속에서 혁명을 하고 다시 정치의 길로 들어섰던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의 생가는 충청도 옥천군옥천읍에 있는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둘러본 기억이 있습니다. 농촌마을인데 당대에 부잣집으로 보였습니다. 청와대 안주인이 되어서 어렵던 시절에 국민과 함께했던 분입니다.

 

아마도 그간의 대통령부인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지요. 하지만 문세광의 총격에 돌아가신 안타까운 분입니다. 사후에도 국민들은 대통령 부인의 자격으로 육영수 여사를 모델로 꼽고 있습니다. 훗날에 대통령이 될 남편과 사시는 아내들은 육영사 여사를 많이 닮아 주시기 바랍니다. 전에 가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가는 한옥으로서 부잣집으로 보였습니다.

 

벼슬도 하시고 제자도 많이 양성하신 분입니다. 최근에 방송을 보니 다른 학자들의 글씨에 대한 비평도 하시고 어려운 정치적 격동을 겪으신 분입니다. 누군가의 글씨를 평하고 새로 써준 후 제주도 유배를 다녀 다시 오는 길에 지난날 자신이 비판한 다른 이의 글을 존중하고 바꿔서 달도록 했다는 사찰에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누구에게나 자신이 태어난 집이 있을 것인데 태어난 집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지금 살고있는 모습에만 강조점을 두는 듯 보입니다. 다시말해 과거지사를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방에 살다가 도시로 이사간 어떤 이의 사례가 떠오릅니다. 이분이 지방에서 활동할 때 받은 지인들의 도움을 표현하고 알리고 고맙다 말했다면 더 큰 명망을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난날의 힘들었던 기억은 본인 스스로 잊어버리려 애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좀더 큰 틀에서 자신의 생가와 어린시절의 추억을 자랑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송가인 생가 관광을 마치고 인터넷에서 검색한 바다향기 가득한 식당을 향해 가던 중에 진도읍 고막매길 2번지에서 '가마솥'이라는 기사님 뷔페집을 발견합니다. 1인 9,000원 뷔페인데 고기, 김밥, 야채, 닭고기 등 20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4인이 자리를 잡고 맛있는 음식을 접시에 한가득 담았습니다. 아마도 점심에 횟집에 갔다면 20만원을 내야 했을 것인데 36,000원으로 점심을 맛나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사실 횟집에서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젓가락을 움직이고 결국에는 매운탕을 먹을때 공기밥 하나 더 추가해서 배고품을 막아내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사식당 붸페는 마음대로 가져다가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운림산방] 국가지정 명승 제80호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 전통남화의 성지, 운림산방입니다.

<진도군 홈피 설명> 진도 여행의 일번지, 운림산방이다. 진도 그림의 뿌리이자 한국 남화의 고향이 바로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곳으로,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남화의 맥을 잇는다. 허련은 진도 태생으로 이웃 땅인 해남 녹우당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는데, 대둔사에 머물던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추사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간다.

 

5대를 이어가는 화풍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자녀들이 그림을 그리고 명필이 되었습니다. 1800년대부터 누대를 이어왔지만 딸의 활약이 보이지 않아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진도 쌍계사 명찰 옆에 자리한 그 사찰보다 더 큰 자리를 잡아서 한옥을 짓고 동양화의 명가를 이어왔습니다.

 

멋진 작은 단아한 호수를 마련하고 가운데에 인공섬을 축조하고 모양 좋은 나무를 심어서 분위기를 키웠습니다. 부드러운 곡선의 뒷산은 하늘높이 자리하고 그 아래 편안한 자리에 자리를 잡은 운림산방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은 오래 기억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스탠드를 세워서 4인가족 전체의 사진을 여러장 찍었습니다.

 

산책길에 나서다가 신비의 바다로 연결되는 오솔길을 발견하고 그 아래로 내려가 남해바다를 밟았습니다. 바다가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다고 합니다. 오늘아침에도 우리 가족은 숙소에서 아침밥을 먹었습니다. 새벽에 담가놓은 쌀을 맛있게 조리하는 전기밥솥에서 4그릇을 퍼서 김치, 진미채, 조각김, 김치국으로 아침을 먹었습니다. 사과, 배, 토마토 등 과일을 먹고 한봉지 남은 아메리카노 쓴 커피도 한잔 했습니다.

 

아침을 달려서 여수에 도착했습니다. 오전 8시반에 출발하였습니다. 앞에 파를 실은 트럭이 저속으로 가므로 30분을 따라오느라 지체된 듯 보입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씽씽 달렸습니다. 새차에는 100km로 자동으로 달리는 크루즈 시스템이 있답니다. 설정하여 두면 별도의 조치가 있거나 앞차와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그 속도로 정속으로 달려갑니다.

 

차선을 지키는 센서가 핸들을 잡아주니 안전합니다. 운전자는 핸들을 잡고 있으면 차가 스스로 고속도로를 달려갑니다. 브레이크를 밟거나 해제하거나 차량이 정체되어 길이 막스면 세팅을 풀어지고 수동운전으로 전환합니다. 그렇게 4시간을 달려서 여수에 왔습니다. 커피점에서 녹차라떼 하나를 쿠폰내고 받아서 다른 컵에 따라서 가족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차 한잔으로 4인을 채우는 마술을 부리는 가족입니다. 우리가족때문에 망한 식당이 한두곳이 아닐 것이라는 농담을 합니다. 리조트에 왔으면 부속식당이나 인근의 맛집에 가야하는데 방콕하고 집에서 가져온 식재료로 아침과 저녁을 먹고 있으니 다른 관광객이 왔을 경우의 매출보다 낮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리조트 모든 객실이 만실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로 이야기하자면 그러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여수 다리를 건너서 이리저리 구경을 하고 이순신장군 광장도 보고 하멜동상도 만나고 1004m벽화마을에 가서 서민들의 삶의 현장을 살펴보았습니다.

 

비탈 언덕위에 지어진 오래된 집인데 벽과 담장에 아름다운 글, 격려하는 그림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해설을 보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해설> 고소동 천사 벽화골목 태동 이야기. 해양공원에서 고소동을 횡단하는 1,004m 벽화 골목 구상이중앙동 4기 주민자치위원회의 마을공동체 형성사업으로 발의되어 이 중 160m에 이르는 현 구간에 대해 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주민 스스로 성금을 모아 EXPO·바다, 지역풍경을소재로 스토리텔링 벽화가 태동되어 보고, 느끼고, 걷고 싶은 골목을 창조하기에 이르다.

 

그렇게 여수에서의 오후를 보내고 이제 숙소에 들어왔습니다. 차분하게 이번 여행을 정리하고 잠시 쉬기로 합니다. 그리고 어른과 청년들의 여행에 대한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통의 성인들은 일단 낮동안에 관광지를 둘러보고 한잔 하고 저녁에 숙소는 어디인가 알지도 못하는 방에 들어와 잠자고 아침에 다시 버스타고 다음 여행지로 갑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오션뷰 숙소를 위해 15,000원을 추가부담합니다. 저녁에 들어가서 바라보는 바다, 아침에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오션뷰가 가치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바다는 산에서도 보고 들에서도 보는 것이니 숙소에서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어른의 생각이고 청년들은 숙소중심의 여행이라서 숙소를 위해서 오전시간을 소비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어느 식당을 가더라도 네티즌들이 평점 얼마를 주었는지, 젊은이들의 평가가 적당한가를 보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이드신 분들이 운영하는 식당의 경우 인터넷으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므로 동네 손님들은 옷지만 원거리 손님은 찾아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인테넛상의 장사꾼들이 찾아와서 이리저리 비용을 청구하면서 손님 많이 오도록 하겠다는 협상을 합니다. 실제로 그리하면 손님이 늘 것이고 한팀이라도 더 오시면 그 덕인줄 알게 될 것이니 인터넷 사업은 번창하고 젊은이들은 다른 청년들의 이야기에 자신을 연결하는 군중심리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인터넷을 연결하는 식당은 성하고 그리하지 못하는 업소는 손님이 줄 것입니다.

 

따라서 기성세대들도 어느정도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야 하고 인터넷 업소를 반겨야 하고 그 틀속에서 사업이든 장사이든, 그리고 일반적인 삶조차도 맞춰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독야청청은 옛말이 되었고 이제는 세류,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이에 어느정도 따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젊은이들은 식당앞에 주차를 하고도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이 식당을 검색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찌 평가하는가를 확인하고 나서야 들어간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판 번듯하고 건물이 깔끔하면 그만한 음식이 나올 것이고, 해장국의 경우 말쑥한 건물보다 어수룩한 초가에서 진국이 나온다는 말은 고전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밤 10시에 귀가합니다. 일찍 숙소에 들어서 8시간정도 호텔을 이용하였으니 밤에 출발하여 내일 오전의 거사를 도모할 것입니다. 훗날에 이번 여행의 이야기를 큰 소재로 하여 더더욱 재미있는 수필을 써낼 수도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감하면서 단체로 가족이 여행을 하면서 말을 아끼고 상호 존중하는 자세와 마음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크게 강조하면서 더 이상의 말은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일정을 변경해서 저녁 7시경에 호텔 수영장을 구경하고 그 건너편의 아름다운 다리의 야경을 찍은 후에 짐을 챙겨서 집으로 향합니다. 오는 길에 3번 휴게소를 가서 쉬고 다시 출발하여 420km 귀가길을 달렸습니다. 차를 운전한지 2년차에 장거리 고속도로를 달린 딸은 한 번도 아빠에게 핸들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젊기도 하지만 스스로 장거리 여행을 모두다 운전하겠다는 의지였고 그렇게 해냈습니다.

 

자율주행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에 운전을 배우고 운전을 하는 딸의 입장에서는 좋은 시기에 태어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빠의 시대에는 파워핸들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오로지 힘으로 핸들을 돌리고 다리힘으로 브레이크를 밟고 액설레이터를 눌러서 전진했습니다. 클러치라는 것이 있어서 동력을 연결하고 끊기를 반복하면서 운전을 했습니다.

 

2023년 이 시대의 모든 차량은 자동변속입니다. 차가 필요로 하는 파워에 맞춰서 자동으로 기어의 크기가 바뀌면서 적정한 출력을 관리합니다. 다양한 센서가 콘트롤합니다. 옆차선에 차량이 가까이 다가오면 경고음이 울리고 신호대기중 앞차가 출발하면 알려줍니다.

 

크루즈 정속주행중에 앞차의 속도가 줄면 스스로 브레이크를 작동해서 속력을 줄입니다. 다양한 관리기능이 탑재된 요즘의 차량은 첨단기술의 집합체입니다. 하지만 이 기기 전체를 다루는 것은 운전자인데 딸 운전자는 이를 컴퓨터 게임하듯이 즐기며 운전합니다.

 

자연스럽게 핸들을 움직이고 침착하게 후방을 보면서 차를 운행하는 모습을 보니 출발하는 날에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여행 마지막날 밤 운전임에도 걱정을 하지 않고 뒷좌석, 회장님 자리에서 잠을 자면서 올라오고 휴게소에 도착하면 내려서 저녁먹고 다음 쉴때는 행장을 정리하는 등 여유로운 여행을 마치고 밤 12시20분에 도착했습니다.

 

엄마가 아파트 뒷편으로 달려가서 주차장소 단 하나 남은 최후의 보루를 발견합니다. 아파트뒷편의 통로를 끝까지 가면 딱 한자리, 화단에 차량을 올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 턱을 오르기 쉽도록 시멘트 구조물을 설치해 준 마지막, 최후의 보루입니다. 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직진으로 들어온 길을 후진으로 나가야 하는 악조건을 만나게 됩니다.

 

한밤중에 이자리를 차지하면 내일아침에 조금만 후진해서 차량을 돌리도록 다른 차량이 출근하였으므로 큰 걱정을 하지 않는 명소이기도 합니다. 집에서 최단거리이니 퇴근도 쉽고 아침 출근에도 불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주차하지 못하면 긴 거리를 후진으로 나가야 하고 또 다른 주차자리를 찾아내지 못하면 길 건너 민방위교육장에 주차하고 밤길을 걸어와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긴 여행, 보람차고 행복한 여행을 마친 가족들이 새벽 2시에 숙면에 빠졌고 오면서 차안에서 회장님 취침을 한 아빠는 새벽에 일어나 4박5일간의 여정중 기억에 남는 부분을 정리하여 여기에 적어둡니다. 행복한 가족여행의 기록을 마침니다. 운전자, 탑승자, 음식 준비자, 조력자 모두모두 수고했습니다.

 

최저가 여행가족의 이야기였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이강석 기자 stone91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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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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